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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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풀 맛[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1. 10. 27. 03:03 수정 2021. 10. 2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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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저렴한 가격으로 보쌈 정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

며칠 전, 장대비 속을 헤쳐 마지막 주문 시간 직전에 도착했는데, 주인아저씨는 귀찮은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고지혈증이 심한 나는 고기를 반드시 야채와 먹어야 했기에 계속 기다렸다.

그날, 나는 상추를 주인아저씨 모르게 맨입으로 허겁지겁 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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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애덤 데이비드슨의 '런치 데이트'
이정향 영화감독
동네에 저렴한 가격으로 보쌈 정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 며칠 전, 장대비 속을 헤쳐 마지막 주문 시간 직전에 도착했는데, 주인아저씨는 귀찮은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반찬을 내놓는데 평소와 달리 쌈 야채가 빠졌다. 상추를 몇 장 주실 수 있냐는 내 청에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가더니 감감무소식이었다. 고지혈증이 심한 나는 고기를 반드시 야채와 먹어야 했기에 계속 기다렸다. 고기는 식어가고,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슬슬 화가 나 식욕도 사라졌다. 대충 몇 점 먹고 일어섰는데… 왼쪽 식탁에 상추 접시가 놓여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내 뒤로 다가와 두고 간 걸 몰랐던 거다. 반짝반짝 씻긴 상추들이 나를 나무랐다. 내 입에선 “아! 런치 데이트…”라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연말연시의 뉴욕 기차역. 잘 차려입은 백인 노부인이 쇼핑백을 잔뜩 들고 가는 중에 흑인 남자와 부딪친다. 가방 안의 물건들이 바닥에 쏟아진다. 그 탓에 기차를 놓치고, 지갑까지 잃어버렸다. 역에 상주하는 흑인 걸인들을 적개심의 눈으로 살펴보지만 범인을 찾을 길이 없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다음 기차까지 시간이 남아 동전을 탈탈 털어 샐러드를 산다. 탁자에 쇼핑백과 샐러드를 두고 포크를 가지러 간 사이, 흑인 걸인이 자리에 앉아 샐러드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노부인이 눈을 이글거리며 내 샐러드라고 주장하지만 흑인은 코웃음 치며 계속 먹는다. 노부인도 질세라 포크를 들이밀고, 둘은 어느새 나눠 먹는 형국이 된다. 그러자 흑인이 커피를 두 잔 사온다. 노부인은 그의 배려에 감동하다가 정신을 차린 듯 일별도 안 주고 자리를 뜬다. ‘저 음식을 훔친 내 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나는 구차하게 얻어먹고, 고마워하다니… 쯧쯧.’

도도하게 나간 노부인은 쇼핑백을 두고 온 걸 깨닫고 다시 식당으로 간다. 분명 그 흑인이 가져갔을 거라고 체념한 채로. 역시 빈 샐러드 접시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런데, 바로 뒤 탁자에 쇼핑백과, 손도 안 댄 샐러드가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한심해서 웃음을 터뜨린다. 편견이 멀쩡한 눈을 멀게 한다는 걸 그녀도, 나도 이때 제대로 배웠다. 하지만 이후로도 나는 종종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런치 데이트’를 떠올리며 자책한다.

그날, 나는 상추를 주인아저씨 모르게 맨입으로 허겁지겁 다 먹었다. 진정한 풀 맛을 맛봤다. 나를 불청객 취급한다고 오해하자 모든 게 그렇게만 보였다. 딱딱 맞아떨어졌다. 오해는 선입관과 편견을 낳고,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변해 판단력을 흩뜨리고 상황을 그르친다. 그럴 때마다 주문처럼 되뇐다. “아! 런치 데이트….”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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