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6·29 선언과 북방 외교,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조선일보 2021. 10. 27.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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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선서하고 있다. 1988년 2월 25일./조선일보DB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별세로 우리 현대사는 또 하나의 장을 넘겼다. 노태우 집권기(1988~1993)는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였다. 두 시대를 주도해온 양대 세력이 가슴에 품은 가치는 달랐지만 시선은 국가 발전이라는 똑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며 교차했던 그의 집권기는 한 가지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역동의 기록이다. 노 전 대통령의 생애 역시 그러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新)군부에서 비롯됐다. 육군사관학교 4년제 정규 첫 기수인 11기 출신으로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동기생 전두환 전 대통령의 뒤를 따랐다. 신군부의 5·18 유혈 진압 책임은 노 전 대통령 평생의 짐이 됐다. 대통령으로서 수천억 비자금 조성도 그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다.

6·29 선언을 빼놓고 노태우를 말할 수 없다. 6·29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민 민주주의 시대 진입을 위해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6·29를 누가 주도했느냐를 놓고 말이 엇갈린다. 다만 대선을 치러야 하는 당사자로서 승리가 담보된 간선제 대신 직선제를 받아들인 노태우의 결단이 없었다면 6·29는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부터 문민정부를 거쳐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기까지의 대한민국의 민주 발전사는 6·29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이뤄진 것이다. 1987년 6월 전국의 거리를 달군 국민적 열망이 6·29와 새 헌법을 쟁취해냈다. 야권 분열 구도 속에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36.6%를 얻어 당선됐다. 10월 유신 이후 15년 만에 나온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재임기는 3김(金) 할거 시대였다.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자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의 평민당을 소외시켜 “지역 구도를 심화한 야합”이란 비판도 받았으나 과거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과 연대했고 이는 군사정권의 종지부와 문민정권의 탄생으로 연결됐다. 여기에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라는 노 대통령의 결심도 역할을 했다.

노태우 시대는 대외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국제 질서가 탈냉전으로 재편되는 격변기였다. 그는 북방 외교로 이 역사적 기회를 잡았다. 각각 동서 진영의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던 1980년 모스크바, 1984년 LA 올림픽과 달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공산권을 포함해 160국이 참여한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1989년 2월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을 시작으로 1990년 9월 소련,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 외교는 그 정점을 찍었다. 사회주의권 국가로의 진출이 막혀있던 반도 국가 대한민국은 북방 외교로 우리의 경제, 생활, 문화권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 한국 외교 최대 업적 중의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채택 등도 노태우 정부의 업적이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노태우 시대 대한민국은 국민 넷 중 셋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분류할 정도로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분배되며 안정을 누린 시절이었다. 연평균 7~8%대의 고속 성장을 계속하면서도 소득 불평등 지수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됐다. 노 대통령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고속철도와 인천국제공항은 이제 없어서는 안될 국가 기간 시설로 자리 잡았다. 그의 집권기 대한민국은 많은 성취를 이뤘다.

노 대통령은 전임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를 백담사에 보내면서 5공 청산 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퇴임 후 자신도 전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서는 운명을 맞았다. 비자금 2628억원 조성,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혐의 등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노태우 정부는 국민에게 가장 초라한 평가를 받아왔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 죄과에다 ‘물태우’로 상징되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의 결단으로 민주화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임기 내내 운동권의 과격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특유의 인내로 극단적 조치를 피하며 상황을 관리했다. 이런 노태우 시대의 과도기를 디딤돌 삼아 김영삼, 김대중 시대가 올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을 계기로 성립된 1987년 체제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현 집권 세력은 군사 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독선과 독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를 바꿀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성장과 복지, 시장과 노동 사이의 균형점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미·중 충돌은 1990년대 동구 공산권 붕괴에 버금가는 충격파를 전 세계에 던지고 있다. 우리 안보의 근간이던 한·미 동맹도 예전 같지 않은데 북은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됐다. 이런 전환기적 위기를 맞은 나라 사정이 한 세대 전 노태우 시대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국내적인 세력 교체기를 관리했던 인내의 리더십, 동서 대결의 낡은 질서가 무너지는 세계의 변화를 앞서 읽었던 혜안의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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