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김현기의 시시각각] 좁쌀 지도자, 괴물 지도자

김현기 입력 2021. 10. 28. 00:21 수정 2021. 10. 28. 06:27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지난 주말 도쿄 신주쿠역에서 일본 제1야당 입헌민주당 에다노 대표의 총선 유세를 들었다. "국민을 외면하는 자민당을 심판해달라", "야당이 하나로 뭉쳤으니 제발 도와달라." '전쟁' 중인 한국 정치에 익숙해서일까, 이런 얌전하고 차분한 야당이 없다. 물론 수혜자는 집권 자민당. 사흘 후 총선에서 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할 것으로 보는 예상은 거의 0%다. 이게 일본판 '예측가능한 정치'인가 싶다.

■ 일, 나카소네 같은 통큰 지도자 부재
'액션'없는 쪼잔한 '리액션 외교'만
저급 지도자 모셔야 될 우리도 걱정


존재감 없는 야당 때문인지 기시다 총리에게도 긴장감이나 신선함이 없다. 아베 때와 변한 게 없다. 어디 가나 "미국을 소중히! 한국과 중국엔 엄격히!"다. 기시다 만의 외교비전이 보이질 않는다. '기시다 위에 아베'를 뜻하는 '아베시다 정권'이란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왼쪽)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사실 그런 비아냥의 시초는 40년 전, 나카소네 총리 출범 때였다. 소수파인 나카소네는 최대 파벌 다나카 전 총리의 전폭 지원을 받아 총리가 됐다. 내각과 당의 요직은 다나카파로 도배가 됐다. '다나카소네 정권'이란 말이 생겼다. 하지만 나카소네는 때를 노렸다. 이윽고 '다나카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미·일 운명공동체론을 펴는 한편 "일본은 아시아와의 우호 협력 없이 존립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모두가 부정적이던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나카소네였다. 역사인식, 미래비전이 동시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선이 굵었다. 2017년 중의원 첫 당선에 성공한 손자(야스타카)가 인사차 찾아오자 당시 101세였던 나카소네가 힘겹게 건넨 단 한마디는 이랬다. "역사를 공부하라."

아베 신조 전 총리(왼쪽)와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나카소네를 회상하는 이유는 비슷한 야유를 듣는 기시다 총리가 과연 '제2의 나카소네'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돌이켜보면 나카소네 이후 일본은 늘 상대방이 내민 손을 잡거나 뿌리치는 외교만 했다.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 테니스나 탁구에 비유하자면 상대방 볼을 그저 리턴하는 것만 생각한다. '액션' 없는 '리액션 외교'다.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사방 눈치만 살피는 '좁쌀 정치인'이 양산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헤이안시대 최고의 작가 세이 쇼나곤은 "작은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다"는 말로 일본을 묘사했지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독특한 문화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일본 외교는 여유와 도량이 없는 그저 그런 외교, 쪼잔한 외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근 워싱턴 소식통에게 들은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한·일 간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자 문제와 관련, 일본의 고위 인사에게 사석에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경제력이 앞서는 일본이 좀 한국에 양보하면 안 되겠는가?" 일본 측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무슨 소리냐. 구매력은 한국이 앞선다. 한국 국민이 더 부유하다", "그래도 일본은 G7이고, 경험도 많지 않으냐."(블링컨 장관), "우린 그렇게 생각 안 한다"(일본 고위 인사). 바로 이게 일본의 현주소다.

연합뉴스·뉴스1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조폭에 범죄동일체, 소시오패스에 강아지 사과까지…. 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선 후보들의 말, 행동 하나하나가 해외토픽감이다. 1일 1실언을 실행 중인 윤석열 후보도 그렇고, 이때다 하고 광주를 찾아 전두환 기념석 밟기 퍼포먼스를 하며 희희낙락하는 이재명 후보도 그렇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역사인식도, 인격 존중도, 알맹이도, 품위도 없다. 후보들이 고작 한다는 게 "누가 더 흙수저냐" "감옥에 보내겠다" 경쟁이다. 이런 저급이 따로 없다. 생각나는 대로 감정을 쏟아내고 상대방을 어떻게 쓰러뜨릴까만 엿본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오징어 게임의 '괴물 정치인'들 뿐이다. 이런 지도자 밑에서 우리 국민이 1등 선진국민이 된다면 그건 아마 기적일 게다. 좁쌀이나 괴물이나, 참으로 일본·한국 모두 지도자복은 지지리도 없다.

김현기 도쿄총국장 겸 순회특파원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