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중앙일보

"서울대서 뭘 배웠나 모르겠다" 세계대회 우승한 여성의 일침

추인영 입력 2021. 11. 19. 05:00 수정 2021. 11. 19. 08:37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직후 행정고시(42회·재경직) 차석까지 했는데 실전에선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꼈단다. 2002년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유학을 떠났다. “경력 인정도 안 되고 지원도 못 받는” 자의 휴직이었다. 유학 중 휴직 기간(5년)을 넘기면서 면직돼 민간인 신분이 됐다. 지난 11일 구글이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 인공지능(AI) 경진대회 ‘캐글’ 데이터 분석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이수형(45)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야기다.


“온라인 교육, 극빈층보다 차상위가 소외”


구글이 운영하는 세계 최대 인공지능(AI) 경진대회인 ‘캐글’의 데이터 분석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이수형 서울대 교수가 16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 교수는 ‘코로나 시대의 교육환경 및 불평등’을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에서 AI 교육서비스의 계층별 양극화를 규명했다. 주최 측이 제공한 미국의 AI 교육서비스 이용 데이터에 경제학 데이터를 접목해 입체적으로 분석한 점을 평가받아 최종 우승 5팀 중 1팀으로 선정됐다.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이 교수는 “극빈층이 많은 학군의 온라인 학습 사용비율은 (정부 지원으로) 오히려 최상위층과 비슷했다”며 “(사각지대인)차상위계층이나 그 이상의 학군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내로라하는 우등생이었지만, 그는 사실 한국 교육에 회의적이다. 막상 올라선 국제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혔던 경험 때문이다. 공무원 2년 차,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장에서 “(역량이 부족한) 내가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알고 싸워야겠다”는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생활은 처절했다”고 한다. “이른바 ‘좋은 교육’을 한다는 서구권에선 늘 건설적으로 비판하기를 훈련했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않았다”면서다. 그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서울대에 왔는데 뭘 배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남은 게 뭔지 생각하면 허무하다”고 했다.

이수형 서울대 교수가 16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을 방문했다. 김성룡 기자


그러면서 “한국의 학부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작은 일이라도 성취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꼭 공부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국에선 꼭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성취감이 높은데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면서다. 또 “아이들이 ‘주어, 동사, 목적어’를 써서 정확히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대화를 많이 나누라”고 당부했다. 그는 “모든 정신적, 금전적 투자를 대학입시까지만 올인하는 것 같다”며 “마라톤 거리를 전력 질주하다 보니 올림픽에 가기도 전에 전국체전에서 탈진해 쓰러지는 격”이라고 했다. “최종 목적지까지 가려면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한국 정책설계, 데이터 아닌 거대담론 의존”


이런 점에서 그가 롤모델로 꼽는 인물은 201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앨빈 로스(70) 스탠포드대 경제학과 교수다. “미국의 A급 경제학자 중에 말 못하는 사람은 못 봤다”는 이 교수의 말대로 로스 교수는 “배경이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제자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챙긴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가 학생지도에 정성을 쏟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번 캐글 대회에 함께한 남민혁(24) 씨도 학부생 제자다. 이 교수가 2016년 귀국해 처음 서강대에서 개설한 강의를 듣던 남씨가 면담에서 “미국에서 박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 그때부터 이 교수가 지난해 서울대로 옮긴 이후에도 연구조교로 함께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앨빈 로스(오른쪽)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함께한 이수형 교수. 이 교수는 로스 교수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다. [본인제공]


이 교수는 의외로 “공무원이나 학자나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설계하는 일”이란 점에서다. 노동경제학자로 세계은행(World Bank) 등 국제기구에 자문 중인 이 교수는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데이터가 아닌 거대담론에 의지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게 실업급여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재교육 등 기타 교육훈련이다. “이미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한 적 없는 프로그램에 왜 예산을 넣어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그는 “미국이나 EU, 일본 등은 데이터 수집과 효과성 분석을 어떻게 할지 먼저 수립하고 정책을 만들도록 입법 체제가 바뀌고 있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정책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통계만 분석하면 다 나온다. 데이터를 보고 실증분석 결과에 따라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