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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입력 2021. 11. 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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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 이후. 기후위기를 낙관하는 이들은 없다. 팬데믹은 지속될 것이다. 2년간 일상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와 생명을 잃은 이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연히 이번 대선의 주요 의제가 환경, 노동 문제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거대 양당은 일부 남성의 성차별 의식을 이용, 이를 표로 연결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다. 며칠 전 경향신문 보도대로, “젠더 지우기로 젠더 공략하는 ‘젠더 대선’”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세대 차이(generation gap)만큼 골치 아픈 언설도 없을 것이다. 이는 노소(老少)에 따른 연령주의(ageism)와 다르다. 그러나 세대 개념은 계급, 나이, 성차별, 취향, 소통 등 많은 문제와 혼용,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저렇게 나이들지 말아야지”처럼 세대 차이는 생로병사의 원리와 함께 시대(일제강점, 한국전쟁, 군부독재 시절…) 경험에 따라 어느 시절에나 존재했다.

이에 반해 연령주의는 사회 구조적 모순이다. 적든 많든 나이로 인한 차별을 말한다. 그만큼 논쟁도 많고 판단도 어렵다. 연령주의는 성별, 계급 차별과 함께 작동한다. 평범한 노인은 노인이지만, 정치인이나 재벌은 노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는 여성의 존재를 사회적 지위나 자원이 아니라 나이와 외모로 평가하는 성차별과 연령주의가 결합된 결과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주장
누구의 기준에서인지 의문
지금 우리 사회는 고통 경쟁 속
‘당신들, 나아졌잖아’라며
약자에게 분노하고 있다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미모의 어린 여성’은 성적으로 소비되고 남성 사회가 욕망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또래의 남성보다 ‘지위가 높지만’, 이는 실제 지위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이다. 아줌마는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리게 보이려면 비용과 관리,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여성을 만날 때 상대방의 손톱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계급과 그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직이든 블루칼라 노동자든, 일을 할 수 있는 손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손톱이 있다. 글쓰기 노동도 손톱이 길면 타자를 칠 수 없다.

한때 이런 농담이 있었다. “남성은 제1의 성, 여성은 제2의 성, 아줌마는 제3의 성.” 이 말의 전제는 인간의 기준은 남성이므로 그들은 1등 시민, 여성은 2등 시민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여성이나 남성이나 각기 내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아줌마’처럼 2등 시민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여성이 실상은 대다수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젊은 중산층 고학력 비장애인 백인 이성애자이면서 자원 있는 아버지를 둔 도시에 사는 ‘예쁜’ 여성은 드물다.

지금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은 왜 중장년층에서는 그만큼 격렬하지 않을까. 갈등은 상호 대칭적인 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성차별이 갈등으로 재현되는가. 양당 후보들은 마치 여성 유권자는 없는 것처럼, 일부 남성의 눈치를 보면서 정책도 없이 그들에게 아부하는 데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남성 중심의 성차별 사회라는 증거다. 선거든 일상에서든 힘 있는 집단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은.

여성은 무시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당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 말대로 “성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을 누가 멀리 내팽개치나 경쟁하고 있다”. 20~30대 청년의 구조적 어려움에 대응하기보다는 목소리 큰 편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 어른’의 태도인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능력’이 선거 전략인지 무지(ignore·정말 모름)인지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라도 나서서 “여성도 유권자”라고 그들에게 고지해야 할 지경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역사상 청년층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장년층의 상황이 청년과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은 실업이 일상화된 시대인 데다 청년층이 취업, 병역, 결혼 등 진로를 놓고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여성은 청년이 아니라 여성으로 분류되어 청년 문제=남성 문제가 되었다.

남성 문화는 남성이 ‘차별당하는 이유’로 징병제, 여성 할당제, “여성의 지위가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나이든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젠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모든 남성이 복무 여부, 보직, 근무 방식 등에서 징병제를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징병제는 여성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다. 남성 사이의 계급투쟁을 젠더 갈등으로 포장, 스스로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 해결은 없다. “군 가산제 부활” “여성도 군대 가라”는 외침은 일단 남성들끼리 합의를 본 후 발언할 문제다. 70년이 넘은 내무반 개조부터 한·미 동맹에 이르는 복잡한 문제다. 가장 빠른 방법은 미국의 랜드연구소에 물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는 남녀 동반 입대를 바라지 않는다. 1974년 미국 경찰은 최초로 여성 근무가 이루어졌지만, 당시 남자 경찰은 스트라이크와 사보타주로 일관했다. “우리가 겨우 여자랑 일하려고 경찰이 된 것이 아니다”라며 여성과 동료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정서는 군인이나 경찰 등 전통적인 남성 직종에서 특히 강하다.

여성 할당제? 현재 국공립대 여교수 비율은 17.9%로, 교육부는 2030년까지 25%로 올릴 계획이다. 실현될지도 의문이지만 남성의 반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편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는 30% 남성 할당제가 적용된 지 오래다. 왜 교대의 남성 할당제는 사회적 반발이 적을까부터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대의 블라인드 테스트 와중에서도 최종 결정에서 암암리에 남학생 할당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 졸업자가 많으면 전공 영역이나 교세(敎勢)가 약화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의 숙직 vs 여성의 가사노동’식의 논의도 큰 문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공사 영역에 걸친 이중 노동이라는 현실 때문에 여성들은 과로와 경력단절을 피해, 비혼을 선택하고 이는 저출산과 동물과의 반려 인생으로 이어졌다.

흑인이 본인의 계급, 능력과 무관하게 평생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듯 여성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가. 여전히 여성은 남성 평균 임금의 60%를 받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은 디지털 성폭력의 등장으로 더 복잡하고 교묘해졌다.

남성의 눈치를 보는 상황은 이재명 후보도 마찬가지만, 조직과 인력 운용 경험이 있는 그는 적어도 정확한 현실을 알고 있다. 지난 13일, 그는 “실제로 여성을 위한 할당제는 거의 없다… 20대 남성이 ‘여성 할당제 때문에 피해를 봤다, 폐지하자’고 하는데 여성 할당제는 거의 없고 대부분 성 할당제”라고 말했다. 즉 “특정 성이 30% 이하로 내려가지 않도록, 실제로 공무원 시험에선 남성이 혜택을 보는 경우가 많다”. 합격선을 넘는 여성 수가 남성보다 많지만, 성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성적이 낮은 남성을 발탁한다.

이러한 현실은 상식이다.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실력으로 뽑으면 여성이 100%라 어쩔 수 없이 남성을 뽑는다는 고충을 호소한다. 여성이 원래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성, 장애인, ‘지방대생’은 차별받는 집단이므로, 공정한 시험으로 자기 능력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런 이야기도 중간층 이상의 사례이다. 우리는 2인 1조의 사업장에 배치된 19세 청년들이 혼자 일하다 사망하는 현실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라지고 부동산과 젊은 남성이 선거의 키워드가 되었다.

무엇보다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인 인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래도 예전(조선시대? 1980년대?)보다는 나아졌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본 적이 없다. 과거를 어떻게 아는가?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과거에 살아야 하는 이들인가? 심지어 “나아졌다”는 주장은 누구의 기준에서인가.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로 고통을 경쟁하면서 약자에게 “당신들, 예전보다 나아졌잖아!”라고 분노하고 있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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