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대기자]"야구하다 끌려간 삼청교육대, 그 아이 어찌 됐을까"

CBS노컷뉴스 권영철 대기자 2021. 11. 2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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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군.경 80만명 동원해서 6만명 넘게 무차별 검거
머리길다고, 야구하다가, 싸움말리다 끌려가기도 해
B등급은 삼청교육 후 전방에서 강제노역 그 후에도 1~5년 보호감호처분
진상규명도 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국가 배상도 제대로 이뤄지지않음
전두환은 5공 청문회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해 매우 유감"이라며 책임 회피
■ 방송 : 김현정의 뉴스쇼 (친절한 대기자)
■ 채널 : 표준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대기자

친절한 대기자, 권영철 대기자 어서 오십시오.

◆ 권영철> 안녕하세요.

◇ 김현정> 오늘 준비해 오신 얘기, 전두환 사망과 관련된 얘기군요.

◆ 권영철> 네,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 벌인 만행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얘기를 준비돼 있습니다.

◇ 김현정> 삼청교육대. 기억. 이것을 추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두환 만행 잔혹사, 이렇게 제목을 붙여오셨네요.

◆ 권영철> 네.

연합뉴스

◇ 김현정> 삼청교육대. 젊은 세대 중에서는 좀 낯선 분들도 있을 거예요.

◆ 권영철> 벌써 40년이 지난 일이니까 잘 모르는 분이 있는데 사실 이 시절에는 법이 필요없는 시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2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당시에는 법도 영장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군부 쿠데타 세력, 신군부가 내세운 삼청교육대의 명분은 불량배 소탕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휩쓸고 있던 양은이파, 서방파, OB파 등 3대 깡패 조직과 일반 깡패들을 제거하여 민심을 얻으려고 하는 정권 차원의 조치라고 했는데요. 전두환 씨가 89년 12월에 있었던 5공 청문회 당시에 밝힌 내용 잠시 들어보시죠.

[전두환]
"삼청교육은 당시 사회 혼란을 틈타 난무하고 있던 고질적인 상습 범죄에 대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특별 교육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생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육군 대장의 진급신고를 받고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 권영철> 전씨는 "삼청교육은 상습적이고 조직적인 폭력·공갈·사기·마약·인신매매 등 각종 사회악을 제거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시국수습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김현정>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 권영철> 그렇습니다. 삼청교육대에 검거됐던 사람이 6만 명이 넘었습니다. 모두 영장 없이 군이나 경찰에 검거됐고요.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영장 없이 무차별 검거하는 건 모두 불법입니다.

군인들이 하는 일에는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삼청작전'이라고 했고,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80년 5월 광주에서는 '상무충정작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삼청작전으로 붙잡은 사람들을 순화교육 시키는 곳이라고 삼청교육대가 됐습니다. '삼청' 하니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국보위가 삼청동에서 있었기 때문에 '삼청작전'이라고 이름 붙은 겁니다. 삼청 작전에 투입된 군인과 경찰이 80만 명에 이릅니다. 광주 항쟁을 유혈진압 한 뒤에 국민을 대상으로 또 작전을 편 겁니다.

군.경 80만명이 합동으로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검거한 사람이 6만 755명에 이릅니다. 경남 거창군의 인구가 6만천여명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검거한 건지 이해 되시죠?

◇ 김현정> 그렇죠.

◆ 권영철>정인수 전 삼청교육진상규명전국투쟁위원장은 언론기고문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5·18 광주항쟁에 기겁을 먹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민을 순치시킬 목적으로, 폭력배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계엄군을 앞세워 고귀한 인명을 상대로 한 토끼몰이식 사냥을 자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계엄포고 제13호 <불량배 일제 검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고질적인 각종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 순화함으로써 밝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1. 대상자
가. 폭력사범(강도 절도치기배 포함)
나. 공갈 및 사기사범(서민착취배포함)
다. 사회풍토문란사범(밀수 마약 상습도박 포함)
2. 검거된 불량배는 일정기준에 따라 분류, 수용 순화조치한다.
3.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기간 중 지정지역을 무단이탈하거나 난동 소요 등 불법
행위 등을 일체 금한다.
4. 대상자는 자수하여야 하며 자수시에는 최대한 관용한다.
5. 대상자의 비행을 알거나 피해를 입은 자는 신고하기 바라며 신고자의 신변을
보장한다.
6. 일정기간 수용, 순화된 자는 사회복귀 후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고 선량한 시
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한다. 위 포고 중 제2항, 제3항 및 제4항을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
고 엄중 처한다.

1980. 8. 4.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 김현정> 토끼몰이식 사냥을 했다.

◆ 권영철> 그렇게 표현도 하기도 했습니다.

◇ 김현정> 검거한 사람이 엄청 많아요.

◆ 권영철> 네. 영장도 없었고 자신의 혐의를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군 작천처럼 사람들을 검거했으니까 사회 공포 분위기가 조성이 됐었죠.

◇ 김현정> 89년이면 권영철 대기자는 나이가 어떻게 됐었죠.

◆ 권영철> 그때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 김현정> 진짜로 공포 분위기가 그렇게 심했어요?

◆ 권영철> 그렇죠. 88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사회가 느슨해지는 분위기 89년에, 80년입니다. 80년 고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 김현정> 그렇죠. 80년대는 고등학생이었겠죠. 삼엄했죠. 그 당시 분위기.

◆ 권영철> 국보위 지침상의 검거 대상은 개선의 정의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문란사범, 사회질서. . 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죄형법정주의'는 소용이 없는 그런 폭압의 시절이었습니다.

◇ 김현정> 그렇죠.

◆ 권영철> 이들을 4등, A, B, C, D 네 등급을 분류했거든요.

◇ 김현정> 고기 등급 나누듯이 나눴어요. A, B, C, D.

◆ 권영철> A 등급이 3000명이 넘는데 군사재판. 민간임에도 군사 재판을 받았고요. B, C등급이 삼청교육 대상자였습니다. 삼청교육은 80년 8월부터 81년 2월 1일까지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11차에 걸쳐 실시가 되었고요. 교육기간은 4주간을 원칙으로 하되 죄질 및 개과천선 과정에 따라서 2주간 훈련한 뒤 조기 퇴소하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 김현정> 억울한 사람이 있었 던 게 문제잖아요.

◆ 권영철> 조직폭력배도 있었고 실제 범죄자도 있었겠지만 영장없이 검거됐고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아 처벌 받았으니 모두가 억울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삼청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전과자 및 폭력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해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음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지만, 경찰서, 파출소들 사이 경쟁이 붙어 이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됐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기억나시죠? 무차별 검거, 그래서 6만명 넘게 검거된 겁니다.

◇ 김현정> 고등학생들도 있었지 않아요?

◆ 권영철> 1988년 당시 치안본부(경찰청 전신)에서 밝힌 자료를 보면 당시 끌려간 이들 가운데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1400여명에 이릅니다. 고교생이 9백여명 대학생이 5백여명 정도라고 합니다.

학생들 중 삼청교육 대상자가 980명이었고, 여성 319명이라고 발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성이 5백명이 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진건데 중학생도 최소 17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교수를 포함하여 공무원, 언론인, 의사, 약사, 기업체 사장 등 사업가가 3475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1988년 삼청교육대 관련 모든 자료가 폐기됐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 김현정> 검거된 사례들을, 기막힌 사례들을 볼게요.

◆ 권영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수집한 피해 사례를 보면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 김현정> 머리길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를 보내요?

◆ 권영철> 자신의 영업 관련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다방에서 손님과 다방 직원 간의 다툼을 말린다고.

◇ 김현정> 다투는 사람도 아니고 다투는 말리는 사람을 데려가요?

◆ 권영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폭행하는 군인들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붙들려가기도 했습니다. 민변에서 수집한 피해 사례 중 보호감호 사례도 있거든요. 고향 친구들과 야구를 하던 중에 경찰에 연행이 돼서 군부대에서 4주간 삼청교육를 받고 1년간 근로봉사 하다가 보호감호 처분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김현정> 야구하는 사람을 왜 잡아가요?

◆ 권영철> 이게 뭐 경찰서에서 실적을 올려야 되니까 뭐, 삼청피해자 모임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면 넝마주이라고, 문신을 했다고, 부부싸움을 했다고, 계를 한다고 붙잡혔다고 합니다.

◇ 김현정> 계를 한다고 잡아가요?

연합뉴스

◆ 권영철> 공원에서 포옹을 했다고 잡혀가기도 하고요. 노상에서 시비를 했다고, 술주정했다고, 불심검문 태도가 좋지 않다고 붙들려간 경우도 있습니다.

◇ 김현정> 야구하다 잡혀간 사람도 있었는데 술주정하다가 잡혀간 사람도 있었겠네요.

◆ 권영철> 피해자 모임의 정인수 위원장은 "김대중, 김영상 계의 정치인, 야당인사, 노동운동가, 바른 기사를 써온 기자 등 군부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인들을 잡아다가 린치를 했다." 이렇게 얘기를 했고요.

◇ 김현정> 일단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면 어떤 교육을 받았습니까?

◆ 권영철> 그거를 교육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군사 훈련 중에서도 가장 센 게 유격훈련이거든요. 유격 훈련보다 더 강도가 높은 가혹행위의 연속이었다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매질은 기본이고 원산폭격, 집단 목봉체조, 거친 땅에서 포복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삼청 교육에서 현장에서 숨진 이가 54명,후유증으로 숨진 이가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가 2600여 명이었으니까.

◇ 김현정> 정신 이상이 돼 버려요.

◆ 권영철> 네. 제가 근무한 군부대 훈련소가 삼청교육대 중 하나였습니다. 83년에 입대를 했는데 그 지급 받은 훈련복 중에 삼청 숫자가 새겨져 있는 옷이 있고 그랬어요.

◇ 김현정>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군을 가셨는데 삼청교육대도 거기서 훈련받고 있었다고요?

◆ 권영철> 삼청교육은 이미 81년에 끝나기는 했는데, 그 훈룐소가 삼청교육대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조교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얼마나 심하게 얼차려를 했는지 탈주하다가 총 맞아 죽은 경우도 있고 맞아서 죽은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직교사로 재직중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체험을『삼청교육대, 악몽의 363일』이란 수기로 퍼낸 정충제씨의 사례도 기가 막힙니다.

합동심사위에서 검사가 자신의 이름·주소등 인정심문만으로 심사를 끝내 삼청교육에 넘겼다고 합니다. 정씨는 5년전 술집에서 경찰과 싸워 5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징계위에 회부돼 품위손상으로 3개월 감봉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이유로 학무과장과 수사과장 등으로부터 사표 제출을 종용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유라고 밝혔습니다.

◇ 김현정> 여성들도 끌려갔을 거 아니에요. 같은 훈련을 여성들도 받았어요.

◆ 권영철> 공식 자료에 여성은 똑같은 훈련을 받았죠. 319명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다시 많았다는 주장하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여성이라고 삼청교육대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충남 서산에 사는 한 피해여성은 여자 삼청교육대 출신인데, 1980년 8월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며 고씨 집을 찾아왔는데, 염전 문제로 마을 주민과 분쟁을 하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서산경찰서에 연행된 고씨에게 수사과장은 "인원이 부족하니 새마을 교육(삼청교육) 받으러 가야겠다"라고 말했다. 항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새벽 6시부터 구보하고 포복 훈련을 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기합을 받았다. 행동이 늦으면 고무 양동이에 물을 퍼다가 머리를 집어넣었고, 반항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여군 여러 명이 몰려와 짓밟는 것을 봤다."고 2002년 의문사진상조사위 조사에서 진술했습니다.

여자 삼청교육 대상은 주로 윤락여성이나 포주, 계주 들이었지만, 평범한 가정 주부도 끌려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불 외판을 하던 한 파월 장병 아내는 이불을 팔 욕심에 짜장면 내기 화투판에서 구경하며 기다리다 도박죄로 붙들려 갔고, 열다섯 살짜리 여학생 7명은 명동에서 편싸움을 구경하다가 잡혀 갔습니다. 경찰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 김현정> 삼청교육 받은뒤에 곧바로 귀가를 했어요?

◆ 권영철> C 등급을 받은 사람은 귀가를 했는데, B급 1만16명은 이후 20여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봉사'라는 이름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됐습니다. 근로봉사는 훈련생들이 자원한 것으로 돼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요에 자원서를 강제로 쓰게 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방 군부대에서 도로 정비사업, 벙커 만들기, 군사시설 정비 등 강제노역에 투입되고 구타에 시달렸습니다. 근로봉사가 끝난 다음에 다시 감호 처분을 받아서 감호소에서 1년에 5년까지 감호처분을 받았습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가 향년 90세로 사망한 23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전 씨의 빈소가 안내되고 있다. 박종민 기자

◇ 김현정> 그러니까 이 전두환 씨가 5. 18에 대해서도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우리를 참 화나게 하는 긴다 5. 18 뿐이 아니에요. 이 삼청교육대로 인한 피해자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은건데. 이 부분은, 삼청교육대 관련 부분은 사과를 했습니까?

◆ 권영철> 사과도 아니고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는데 역시 5공 청문회 때 하던 얘기인데 잠시 한번 들어보시죠.

전두환 - "당시 사회안정을 시급히 회복시킨다는 목적에서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다 보니까 시행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 바. 이 점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권영철> 국가 폭력을 자행했는데 좋은 일을 하다가 선의의 피해자가 생겼다고 유감이라고 밝힌 게 처음입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 이게 사실은 5월 항쟁이 끝난 직후에 이루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사회 분위기를 억압하려는 토끼몰이식, 이런 군사작전이었거든요.

더 큰 문제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은 강제노동과 구타에 시달렸을뿐 아니라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는 겁니다.

피해자들 진술에 따르면 정부는 10년 정도 피해자들을 전산 관리했다고 합니다. 주민등록 등본에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라고 표시하는 바람에 이들은 취업에도 불이익을 받았고, 이사를 갈 때마다 동사무소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특히 신군부가 삼청교육대를 업적인 것처럼 미화하면서 주변사람들은 '갈 만하니까 갔겠지' 하는 세간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때문에 정상적이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 김현정> 진상규명은 되긴 됐어요?

◆ 권영철>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참여 정부 시절에서 보상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체 대상자 중 11%만, 그것도 다치거나 사망한 게 입증된 사람만 받았거든요.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 정신적으로 후유증을 앓는 사람에 대해서는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변이 11월에 와서야 지금 22명을 대리해서 소송을 냈거든요. 국가 배상 소송을 냈거든요. 앞으로 더 추가로 모집해서 소송을 할 텐데 이들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당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피해 배상이 반드시 이뤄줘야 할 거라고 봅니다.,

◇ 김현정> 여기까지 권영철 대기자 수고하셨습니다.

◆ 권영철> 네.

CBS노컷뉴스 권영철 대기자 bamboo4@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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