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

항장은 불살이라?..25년 전 전두환을 단죄하지 못한 이유

전광준 입력 2021. 11. 25. 13:36 수정 2021. 11. 25. 16:56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뉴스AS][전두환 사망]전두환, 사형에서 무기징역 감형
회고록서 "나는 항복한 적 없어"
전두환(오른쪽), 노태우는 군형법상 내란죄, 반란죄 등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8월 26일 1심 선고공판에 나란히 선 두 사람. <한겨레> 자료사진

12·12 군사반란 주역이자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지난 23일 숨졌습니다. 전씨는 1996년 내란죄 등으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감형돼 무기징역이 확정된 인물입니다. 전씨는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 ‘추악한 동기로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 ‘정치재판’ ‘치욕으로 남은 법원 판결’이라고 적었습니다. 만약 사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에서 가정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단 한마디의 사죄와 반성도 없이 떠난 그에 대해 많은 이들이 느끼는 분노와 허망한 마음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겁니다. 25년 전, 대한민국은 그를 단죄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못했을까요. 20년이 훌쩍 넘은 그때의 판결문을 다시 한번 펼쳐봤습니다.

1996년 8월26일 나온 전씨의 1심 판결문입니다. 당시 서울지법 제30형사부(재판장 김영일)는 내란죄 등 혐의를 받는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2259억5천만원의 추징금도 함께 명령했습니다.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1심 재판부가 A4용지 세 쪽에 걸쳐 양형 이유를 밝혔는데요. 이를 짧게 정리해봤습니다.

“12·12 사건과 5·18 사건을 일으켜 군 내부 질서를 파괴하고 (중략) 헌법질서를 문란케 함으로써 (중략) 우리 헌정사를 크게 주름지게 한 점에서 그 죄질이 매우 무거운 점”, “수괴로서 범한 12·12사건 및 5·18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 및 피해자 유족 등이 그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결국 우리나라 대통령이 됨으로써, 이를 지켜본 국민들에게 그들이 준수하고자 노력하여 온 법질서가 파괴되고 무시되어도 막강한 무력이나 권력 앞에선 이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준 정신적 피해가 큰 점”, “기업주에게 공여받은 뇌물 총액이 수천억원에 이르러 말할 수 없이 크고 그 대가로 일부 기업주들에게는 구체적 이익을 허용해주는 등 뇌물수수죄 죄질이 매우 좋지 않은 점”, “(이로써) 자신의 범한 죄의 법정최고형을 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1심은 전씨가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계엄군의 광주 시민에 대한 발포를 사실상 명령했다고도 판단했습니다. 당시 법원은 전씨가 1980년 5월19일 광주 상황에 대해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보안사 기획처장을 광주에 보냈고 20일엔 시위가 격렬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봤습니다. 같은 날 오후 8시30분께 육군본부 정식지휘 계통을 통해 계엄훈령에 있는 자위권 발동지시가 당시 광주에 있던 계엄군에 하달됐다고도 파악했습니다. 이에 1심은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을 지시하면 상호 간에 교전이 벌어질 수 있고, 자위권발동 방법에 따라 3회 이상 경고해 하퇴부를 조준해 사격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상황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자위권발동지시를 했다”며 “계엄군으로 하여금 자위권발동지시를 제한적이긴 하나 사실상의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서 (중략) (계엄군이) 살상행위를 자행했음으로 (전씨 등의) 자위권발동지시는 실질적으로 발포명령”이라고 판시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의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며 목격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는 전두환이 2021년 8월 9일 오후 항소심 재판에 출석한 뒤 25분 만에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광주지방법원을 떠나고 있다. 공식 석상에 노출된 전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광주/공동취재사진

그러나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이 있던 그해 12월16일 전씨의 사형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합니다. 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권성)는 1심과 같이 전씨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6·29 선언을 수용해 민주회복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단서를 연 것”을 감형 사유로 들었습니다. 이어 전씨를 살린 문장이 판결에 담깁니다. “권력을 내놓아도 죽는 일은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일은 쿠데타를 응징하는 것에 못지않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다.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감일등하지 않을 수 없다.” 항복한 장수는 죽일 수 없으니 화합을 위해 사형시킬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겁니다. 무협지나 역사소설에나 나올 법한 표현이 법원 판결문에 담기면서 유명해진 문장입니다. 2심은 전씨가 사실상 발포를 명령했다는 1심 판단도 뒤집습니다. 추징금도 2205억원으로 줄입니다.

전씨는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권성 2심 재판장의 공판 진행과 관련해서 나는 물론 변호인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공소가 제기된 사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6·29 선언을 재판장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양형 판단에 참고했다는 사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6·29 선언을 함으로써 ‘항복’한 일도 없고,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 폭거에 ‘항복’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항장’이라는 말은)나로서는 어이없는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이듬해인 1997년 4월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윤관 대법원장)도 이런 원심판결을 확정합니다. 전씨의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입니다.

전씨가 자유로워 질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입니다. 그해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협의한 뒤 이틀 뒤인 22일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의 특별사면과 복권을 단행합니다. 당시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전씨가 자신의 죄과에 대해 조금이라도 국민 앞에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뜻을 밝히지 않았는데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는 것은 ‘면죄부’를 준다는 심리적 저항을 부를 수 있다”며 “때이른 사면 복권은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문제로 남을 것”이라 지적했습니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전씨를 단죄할 기회를 차버린 결과, 우리 사회는 지난 25년 동안 사망 직전까지 자신의 죄과에 대한 뻔뻔한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그를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의 망언을 들으며 5·18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이 느꼈을 참담함을 감히 가늠하기 힘듭니다. 2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낸 성명에도 그런 참담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지도 않고,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은 전두환의 죽음을 역사는, 광주는, 그리고 피해자들은 결코 슬퍼할 수 없다.”

여전히 그를 애도하고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 이상, 그의 폭정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