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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살린 고교학점제? "내신 쉬운 과목 몰리고..뭘할지 몰라 친구 따라"

김지은 입력 2021. 11. 26. 05:06 수정 2021. 11. 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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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남은 교교학점제 '시기상조론']
시범학교 5곳 학생·교사 인터뷰.."취지 좋지만 대입은 따로"
초·중 진로교육 약해 대다수 학생 진로 확신 없는 점도 문제
2020년 2학기 ‘지식재산일반-공통과학 융합수업’을 듣는 인천 명신여고 학생들의 모습. 변리사를 초빙한 가운데 학생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지식재산특허권을 내보는 수업으로,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이처럼 외부 전문가와 교사가 함께 가르치는 ‘융합과목’ 개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진 교육부 제공
2025년 전면 도입 예정인 고교학점제가 올해 중학교 2학년과 1학년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2023~2024년 부분 도입된다. 도입 시기가 사실상 2년 앞당겨진 셈인데 부분 도입을 1년가량 남겨둔 현재, 교육계에서는 ‘시기상조론’이 팽배해 있다. 진보와 보수 성향을 대표하는 교원단체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동시에 준비 안 된 고교학점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최적화된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면서 정시를 확대한 모순을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교원수급 정책도 그대로 둔 채 과목 선택권만 늘려놓은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24일 교육부가 고교학점제를 반영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을 발표하자 반발이 더욱 거세지는 모양새다. <한겨레>가 고교학점제를 시범 적용 중인 연구·선도학교 5곳을 취재한 결과, 학생들은 진로 탐색보다는 수능 준비와 내신 따기에 몰두하고 있었고, 교사는 다과목 지도의 부담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대로 도입하면 고교학점제의 좋은 취지가 퇴색되고 제도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장의 경고를 심층 보도한다.

“인기 없는 과목을 선택하면 1등급 수도 적어지니 성적 받기가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1차 수요조사를 할 때는 원하는 과목을 골랐다가, 인원수가 적다 싶으면 2차에서 결국 많은 사람이 신청하는 과목으로 바꾸는 친구들이 많아요.”(울산 남목고 3학년 강성훈)

“진로를 갈팡질팡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도록 학교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지금도 종종 주위에서 ‘친구 따라 과목을 선택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아무거나 했다’는 경우를 보거든요. 1학년 때 진로교육이 충분히 진행되면 더 수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수원 고색고 2학년 차민우)

고등학생이 직접 선택과목을 골라 수강하고, 이수기준에 도달한 과목에서 학점을 받아 졸업하는 고교학점제 도입이 예고됐다. <한겨레>가 최근 대면 또는 전화로 인터뷰한 5개 연구·선도학교 학생들은 2023년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되고 2025년 전면 도입될 고교학점제를 미리 경험하며 ‘미래의 홍역’을 앞당겨 치르고 있었다.

학생의 진로와 적성을 기반으로 희망 과목을 배우는 선택교육과정이라는 고교학점제의 취지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실제로 경험해본 학생들도 넓어진 선택권을 큰 장점으로 꼽았다. 울산 화봉고 2학년 ㄱ양은 “간호사를 꿈꾸는데 미리 ‘공중보건’ 과목을 들어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상대평가 여전…점수 잘받는 과목 골라

하지만 교육과정과 떼놓고 운영할 수 없는 대학입시 제도는 고교학점제의 도입 취지 자체를 뒤흔들 만큼 준비가 미흡한 상태다. “학종 준비하는 친구들은 진로에 맞춰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자기소개서 쓸 때도 도움이 된다며 좋아하더라”는 구리시 ​갈매고 3학년 장아무개양의 말처럼, 고교학점제는 ‘학종용’ 교육과정이다. 하지만 정부가 정시 비중을 40% 이상으로 확대한 탓에, 정작 입시 과정에서 학생들의 선택과목을 주요 평가지표로 활용하는 학종의 비율은 줄고 있다.

더욱이 고교학점제는 2023년 부분 도입으로 앞당겨졌지만 모든 선택과목에 대한 성취평가제(절대평가)는 여전히 2025년에야 본격 시행된다. 상대평가에 의한 순위 경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진로에 신경쓰기보다 내신 1등급을 받기 쉬운 과목을 선택하는 건 당연하다. 장양은 “진로에 필요할 것 같아서 수강 인원이 적은 과목을 들었는데, 성적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며 “그러다 보니 (진로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내신을 따기 쉬운 과목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인천 명신여고 학생들이 ‘지식재산일반-공통과학 융합수업’의 일환으로 모의법정을 열고 있다. 사진 교육부 제공

진로 목표 바뀌면, 정시로 입시 바꾸기도

대다수 학생이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국의 현실은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킨다. 고교학점제 취지대로라면,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미래 설계에 맞춰 선택과목을 골라야 한다. 하지만 현행 초등학교·중학교의 진로 교육은 충분치 않고,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선택 앞에서 방황한다. 강성훈군은 “꿈을 3학년에 올라와서야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1~2학년 때는) 무조건 사람 많은 수업을 들어서 성적을 일단 올리자는 생각으로 과목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불암고 1학년 최서윤양은 “진로를 생각하면 미디어학과를 가고 싶지만, 내신 점수가 이과 계열이 잘 나오는 편이라서 일단 이과 계열의 선택과목을 이수하려고 한다. 진로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정보가 부족하니 확신을 갖지는 못한다”고 설명했다.

결국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나 학생부 교과전형용 내신 상대평가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과목으로 학생들이 대거 몰리고, 그렇지 않은 과목은 수강 인원이 적어 폐강되는 사례가 속출한다. 학생들의 다양성과 자율권을 존중한다는 제도의 당초 취지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강성훈군은 “고교학점제 특성상 실제로 원하는 과목을 듣는 친구들은 당연히 열심히 듣겠지만, 실제로 원해서 선택한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라며 “점수 때문에 전략적으로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진로가 바뀌어 원하는 과목을 미리 이수하지 못한 경우가 잦다 보니, 고교학점제가 목표하는 바와 정반대로 정시로 입시 전략을 변경한 학생도 많았다. 가령 1학년 말에 물리Ⅰ을 선택해 2학년 때 들어놔야 3학년 때 물리Ⅱ를 수강할 수 있는 것처럼, 선수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과목들은 고학년이 되어 선택을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암고 2학년 강현서양은 “이과 계열에서는 과목 선택으로 후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며 “그런 친구들은 수시로 가면 무슨 과목을 선택했는지 평가받게 되니까, 정시로 바꿨다”고 말했다. 갈매고 3학년 장양도 “1학년 때는 꿈이 수학 교사여서 굳이 물리를 듣지 않았는데, 2학년 때 건축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하지만 물리Ⅰ을 듣지 않아 3학년에도 물리Ⅱ를 선택할 수 없게 돼 너무 난감하더라”며 “학종으로 건축과를 지망하면 물리를 듣지 않은 게 마이너스 요소가 될 것 같아 정시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중학교·고1 때 진로교육 충분히 해야”

이렇다 보니 고1 학생들은 과목 선택에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부족한 진로 정보에 갈증을 느끼기도 한다. 진로 선택이 학생들에겐 ‘자유’가 아닌 ‘부담’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불암고 1학년 김경태군은 “사회복지 쪽으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가족과 친구들이 ‘그 선택으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겠냐’는 등 단점을 많이 이야기하니 바꿔야 되나 싶고 너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24일 발표된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에 따르면, 앞으로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진로연계학기’가 도입돼 미리 고교학점제 안내를 받고 희망 진로를 구체화한 뒤 고교 선택과목 설계를 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중학교 단계의 ‘진로연계학기’는 2027년에 처음 시행되기 때문에 그 전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과도기적 상황에 부작용이 속출하자 고교학점제 도입을 찬성했던 교원단체들까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는 “현재 학교 교육의 변화를 위해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건 맞지만, 근본적인 평가 제도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오다 보니 선택과목이 결국 수능 점수와 내신 따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경원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도 “2023~2024년의 부분 도입 시기에는 학생들 입장에선 (입시에 따라) 인원수가 많거나 난도가 낮은 과목을 선택하는 편향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과목 선택권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대입 준비만 더 혼란스러워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교 교사는 “학생들 입장에서도 한번밖에 없는 시절인데 고교학점제의 실험 대상으로 지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400명 중 1등급 16명 위한 교육→중하위권 의미있는 배움” 취지는 좋은데…

고교학점제는 입시학원화한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하고, 학생 개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해 다양한 성장 경로를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추진하는 제도다. 고등학교 수업량 기준인 ‘단위’가 ‘학점’으로 전환되고, 고교 3년간 총 이수학점은 기존의 204단위(2890시간)에서 192학점(2023~2024년 2720시간, 2025년 2560시간)으로 조정된다. 전면 도입이 되는 2025년부터는 ‘모든 선택과목 성취평가제’와 ‘전 과목 미이수제’도 적용한다. 성취평가제는 성적순 상대평가 대신 학생별로 교과학습 도달 수준에 따라 등급으로 평가하는 제도다. 미이수제는 학교교육의 책무성을 강화한 제도로, 학업성취율이 40%에 이르지 못하고 출석률이 3분의 2에 모자라면 별도 과제를 수행하거나 보충 과정을 들어야 한다.
이 같은 제도의 궁극적인 의도는 중하위권 학생들도 학교가 정해준 과목이 아닌 스스로 적성에 맞는 과목을 들으며 의미 있는 배움의 기회를 갖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한겨레>가 최근 5개 고교학점제 연구·선도학교 학생들을 인터뷰한 결과, 교육부의 목적에 부합하는 현상도 일부 나타나고 있었다. 선택권 보장이 학습 의욕과 성적 향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전북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학교 이미지 악화 우려 속에 중하위권 학생들이 기초를 다질 수 있는 과목을 개설해 효과를 봤다. 이 교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중간쯤 수준인 ‘기본영어’, ‘기본수학’을 개설했는데, 270명 중 70명 정도가 신청을 했다”며 “3월과 6월 모의고사 성적을 비교하니 수업을 들은 4~6등급 학생들이 급상승했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고등학교 생활 내내 잠만 자고 좌절감만 느끼게 하는 게 아니라 책임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 게 고교학점제의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변화는 학생들도 체감한다. 서울 불암고 2학년 김신의양은 “중하위권 친구들도 각자 좋아하는 과목은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하고 준비를 하더라”며 “고교학점제가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수원 고색고 2학년 차민우군도 “선택과목에서 공부에 재미를 붙여 또 다른 학습에 영향을 미치면서 실제로 중하위권이었던 친구가 2등급까지 오르는 걸 직접 봤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정해준 과목만 듣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일찍부터 진로 고민을 하게 되니 ‘사고의 근육’을 키울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첫 선택을 고민 중인 불암고 1학년 최서윤양은 “진로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공부하게 됐다”며 “정보통신학과를 고민하다가 (대학에 진학한)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컴퓨터를 세부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나의 적성과 맞지 않는 걸 깨달았고, 미디어학과로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존 교육 제도에서 중하위권 학생들이 상위권 학생들의 점수를 깔아주기 위해 존재했다면, 고교학점제는 각각의 능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장점이 크다고 설명했다. 고교학점제를 찬성하거나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 장기적으로라도 성공시켜야 할 프로젝트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송경원 정의당 정책위원은 “400명이 같은 과목을 듣게 해서 16명을 1등급 만들어주는 게 그동안 학교가 선호한 입시 전략이다. 상위권 학생들은 좋지만 중하위권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도 못한 채 앉아만 있었던 것”이라며 “다만 대학 서열화 완화 등 사회적 변화도 병행돼야 학생들의 자유로운 과목 선택권이 진정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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