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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더 이상 여성 잃을 수 없다" 강남역에 '오징어게임'·군인·간호사·아기엄마 모인 이유는

박현주 입력 2021. 11. 26. 07:31 수정 2021. 11. 2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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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맞아 플래시몹
"여성폭력은 국가·정치·사회·문화 모두의 문제"
'오징어게임' 캐릭터·군인·간호사 등 다양한 복장.."모든 여성들 대변하기 위해"
25일 여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모인 시민들이 노래에 맞춰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박현주 기자 phj0325@

[아시아경제 박현주 기자] "강간범은 바로 너! 강간범은 바로 너! 공범은 경찰, 법원, 국가, 정치!"

오가는 인파로 붐비는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저녁 7시가 되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한 무리의 시민들이 큰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10대부터 20·30·40세대 등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은 대열을 맞춰 서서 "강간범은 바로 너"라고 외치며 일제히 손을 뻗어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이는 25일 유엔(UN)이 지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서울여성회와 그 특별지부인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서페대연)가 함께 벌인 '플래시몹(다수가 특정 장소에 잠시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시위하는 것)'이다.

◆ "여성폭력 추방하자" 칠레서 시작된 '성난 외침', 전 세계로 번져

지난 2019년 10월25일, 칠레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성난 외침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울려 퍼졌다. 칠레 여성단체 '라스테시스(Lastesis)'가 만든 '너는 강간범이다(Un violador en tu camino)'라는 공연작품을 토대로 한 이 플래시몹은 미국과 유럽, 멕시코와 브라질 등 전 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2년 뒤 이날 강남역에서 같은 장면이 재현됐다. 주최 측은 "오늘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지만, 대한민국 여성들의 현실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라며 "여성 폭력은 이를 용인하고 있는 사회와 문화, 국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공군 성폭력 사건 △학교 내 불법 촬영 △대학 내 성폭력 등 최근 발생한 여성폭력 사건을 언급하며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 처음 제정된 지 40년이 지난 오늘, 여성이 안전한 사회가 됐느냐"고 반문했다.

여성폭력을 추방하자며 길거리에 나선 이들에게 강남역의 의미는 남다르다. 지난 2016년 5월 한 여성이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이후 사건 현장과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생겨났다. 이들은 지난 5월에도 이곳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 추모행동을 벌였다.

주최 측은 "우리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은 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강남역에 모여서 외쳤다"며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강남역에 모여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가 겪는 폭력을 말하고, 우리의 몸짓으로 여성폭력과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 폭력 항의 퍼포먼스 펼치는 칠레 여성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군인·학생·간호사 등 다양한 복장 "모든 여성들 대변…여성의 옷차림은 폭력의 이유가 될 수 없어"

특히 군복, 교복, 간호사복 등 다양한 복장으로 플래시몹에 나선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속 체육복을 입거나 아기 인형을 포대기로 감싸 업은 참가자도 보였다. 이는 공군 성폭력 사건, 학교·직장 내 성폭력 등 최근 벌어진 일련의 여성폭력 사건들을 상징한다고 주최 측은 설명했다.

서울여성회 운영진인 최지수 씨는 "(다양한 복장을 통해 여성 폭력이)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흔히 '어떤 옷차림을 입었느냐', '어떤 행동을 했냐'(는 질문을 통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가해진다. 옷차림이나 행동과 관계없이 성폭력은 가해자의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최씨는 조리종사원을 의미하는 분홍색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서울여성회 회원인 이해은 씨는 산업노동자를 의미하는 작업복을 입었다.

플래시몹 뒤에는 발언이 이어졌다. 강나연 서페대연 운영진은 발언에 앞서 최근 교제살인 사건으로 숨진 여성 피해자들을 위한 묵념을 제안했다.

묵념을 마친 그는 자신이 다니는 대학 내에서 여성혐오가 이뤄지고 있다고 고발하며 "여성폭력은 모두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고 있다"면서 "지나가시는 분들,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위해 같이 싸워달라"고 촉구했다.

플래시몹 시작 전부터 한참을 서서 지켜보던 A씨도 발언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며 "더 이상 나같은 성폭력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발언이 끝난 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근처에서 학원을 다녀서 길을 지나가다 플래시몹을 보게 됐다"며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발언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또다른 참가자는 "대통령과 대선후보들을 포함한 정치인들이 여성폭력 근절을 향한 의지를 보였으면 좋겠다"며 "의지를 넘어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며 정치권을 겨냥했다.

플래시몹 뒤에 이어진 참가자들의 발언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박현주 기자 phj0325@

자신을 특수학교 교사라고 밝힌 B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플래시몹 소식을 접하고, 참여하게 됐다. 그는 "여성폭력 사건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정치권에서도 여성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 답답하고 화가 난다"며 "분명 여성폭력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가상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길을 지나던 20대 여성 정모씨도 "아무래도 여성폭력 사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 않냐"며 "여성으로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많고, (플래시몹 취지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 2019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성폭력 추방 주간, 가정폭력 추방 주간을 통합한 '여성폭력 추방주간'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가 두 번째인 여성폭력 추방주간은 이날부터 일주일간 '우리의 관심이 여성폭력 없는 일상을 지킵니다'를 주제로 운영된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여전히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성들이 있어 마음이 아프다"며 "제도 정비를 꾸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여성과 남성의 삶은 맞닿아있다. 여성의 안전이 곧 사회의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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