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문화일보

<살며 생각하며>'화단의 이방인' 최욱경을 보다

김영나 기자 입력 2021. 11. 26. 11:40 수정 2021. 11. 2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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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색·형태·선 그 자체가 작품

추상미술 향한 모더니스트

강렬한 채색·대담한 붓 구사

남성 중심 화단에 대한 도전

‘일어나라! 더 너를 불태워라’

예술도 삶도 불꽃같이 ‘활활’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최욱경 전시가 10월 27일부터 열리고 있다. 1980년대에 최욱경과 같은 대학에서 재직한 필자로서는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감개무량했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활동하다 1970년대 말 귀국한 최욱경은 대형 화면에 강렬한 채색과 붓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대담한 여류화가’로 알려졌다. 지금은 여성 화가라는 말도 젠더 문제로 사용하기 조심스럽지만, 당시에는 여류화가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사용됐다. ‘대담한 여류화가’였지만 그의 그림에 대해 한국 화단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국문화원에서 가진 귀국 개인전에서 미국적 체취가 너무 강하다는 평, 심지어 버터 냄새가 난다는 말까지 듣고 그는 화단의 편협함에 상처를 입었다.

최욱경은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 초등학생일 때 당대의 유명한 화가 김기창, 박래현 화실을 다녔고, 이화여중과 서울예고에서는 김흥수, 정창섭, 김창열과 같은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지도를 받았다. 서울대 미술대학을 나와 1963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뉴햄프셔대 등에서 교수로 있었다. 최욱경이 미국에 갔을 때 그곳 화단에서는 순수한 색채와 휩쓸어가는 듯한 붓 터치, 대형 캔버스가 특징인 추상표현주의 운동이 한창이었다.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 흐름에 동참했다.

1979년에 한국에 돌아와 처음 영남대에 재직할 때 최욱경을 사로잡은 것은 경상도 지방의 산과 능선, 거제도 학동 앞바다의 물빛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태양광선 속에서 아름다운 산수의 색채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화면에는 초기의 열정적인 색채가 조금씩 다듬어져 곱고 부드러운 색채와 유연한 선, 형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잡고 정착하는 줄 알았던 최욱경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은 나이 45세이던 1985년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400여 점. 오늘날 한국 화단이 국제적이 되고 많은 미술가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면 최욱경도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훨씬 더 각광 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과거 여성 화가들의 삶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최욱경보다 앞서 활약했던 여성 화가 나혜석, 천경자를 떠올리게 된다.

글과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사회의 관습과 거리가 멀었던 첫 번째 여성 화가는 나혜석(1896∼1948)이었다. 1918년 일본에서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3년 후에 가진 개인전에는 관람객이 약 5000명(당시로서는 대단한 숫자)이었을 정도로 나혜석은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신여성 화가였다. 1931년에 이혼을 하면서 나혜석은 공개적으로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고 남녀의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여성은 독립된 인간으로서 주체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전통적 가치를 전복하는 이런 공개적인 고발을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모두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결국, 나혜석은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신여성 나혜석의 개인적 고난은 재능 있는 여성 화가의 삶이란 결코 평범할 수 없음을 일반인들에게 각인시켰다.

나혜석보다 28세 아래인 천경자(1924∼2015)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울 무렵에도 여전히 여성 화가란 드문 존재였다. 천경자는 처음에는 뱀을 그리는 여성 화가로 관심을 모았다. 국전에서 상을 탄 ‘생태’(1950∼1951)에서 그는 비단 허리띠인 줄 알고 집으려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친구 화자를 생각하고 33마리의 뱀을 그렸다. 그러다 당시 자신이 사랑하던 유부남 신문기자가 뱀띠이며 35세라는 것을 알고는 나이에 맞춰 두 마리를 덧붙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감미롭고 화사한 색채와 농밀한 꽃향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 속에 천경자는 길고 커다란 눈에서 요기가 느껴지는 여성의 분신으로 나타난다.

천경자 작품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은 솔직하고 맛깔스러운 글솜씨를 보여주는 그의 여러 권의 수필집이 나오면서였다. 천경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한 여인의 꿈과 정한(情恨), 그리고 삶이라고 했다. 그 후에도 원시적인 열대 동물과 꽃 등의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던 천경자는, 고독하지만 사회의 규범에 상관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여성 화가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미지 중심의 작품을 그렸던 천경자와 달리 최욱경은 색·형태·선 자체로 작품이 되는 추상미술을 행한 모더니스트였다. 따라서 최욱경의 작품은 천경자와 같은 대중적 이해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처럼 자신이 남과 다름을 늘 의식했던 화가였다. 거대한 화면에 강렬한 채색과 대담한 붓의 구사는 그에게는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남성을 넘어서는 도전이었고, 또 한 여성 화가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의 화실에는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보헤미안처럼 차리고 다니던 그를 평론가 이경성은 한국 화단의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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