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폐허서 마천루 도시로.. '서울 변천사' 들여다보기

조성민 2021. 11. 30.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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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광복 후 서울 정치·경제 등 변화상
표석 38개·사진 223장 함께 해설
원조 물자 이용해 초기성장 이뤄
서울 중심 종로, 상업·문화1번지로
동대문, 평지 많아 도매허브 구축
'연탄공장촌' 수색, 목욕탕 즐비해
논밭이던 강남은 '최고 부촌' 변신
1976년 강남 개발이 붐을 일으켜 압구정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가운데 한 농부가 소를 끌고 밭갈이하는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풍경은 광복 이후 급격히 변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1960∼70년대 연평균 9%라는 고도성장을 이루며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1950년 160만명이었던 인구는 1970년 50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은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하며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개최한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전국역사지도사 모임이 펴낸 책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는 이 같은 서울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변화상을 표석 38개, 자료 사진 223장과 함께 담아냈다.

◆폐허에서 일궈낸 도시, 서울

광복과 함께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칭됐다. 이듬해에는 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렸다. 전쟁이 끝난 이후 서울은 원조 물자를 이용한 제조업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새로운 도시 건설에 주력하면서 근대적 도시화를 이룬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는 서울이 상업 중심지이자 문화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특히 종로서적,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은 1980년대까지 서점이자 대표적 만남의 광장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종로에서 만나’라는 말은 곧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던 종로서점에서 만나자는 뜻이었다. 염상섭·박인환·김수영 등은 종로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근대 문인들이며,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 종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60년대 명동 다방.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다방이 명물이었던 명동도 빼놓을 수 없다. 문인들은 ‘모나리자’, 화가들은 ‘금꿩’, 방송인은 ‘라이뿌룸’, 연극인들은 ‘은하수’ 등으로 모이며 아지트를 꾸렸다. 다방은 당시 멋과 유행을 주도하던 예술 1번지였고, 명동은 문화 예술의 산실이었다. 마포에서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가 지어지고, 팔도의 소금배가 드나들던 곳에는 한강 개발로 강변도로가 만들어졌다.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는 세계 최초 대용량 지하 발전소가 됐다.
동대문은 사대문 주변 중 유일하게 넓은 평지 지형인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전차와 기동차가 다녔고, 강남 개발 이전에 고속버스의 절반이 이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서 전국적인 도매망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했다. 동대문시장은 실향민, 도시 빈민, 전국에서 생계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까지 하나둘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해 국내 최고의 유통단지로 성장했다.
◆‘한강의 기적’ 통해 현대적 대도시로

서울은 영동 개발을 시작으로 성장과 확장을 이뤄내며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한다.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서울 시민들의 생활 수준은 높아졌지만, 과도한 인구 집중으로 각종 도시문제와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경기도 고양군·양주군·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면서 서울은 확장했고, 영동 개발을 필두로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촉진됐다.

광복 후 수색역 주변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직접 운반해온 석탄을 가공하는 연탄공장들이 들어섰다. 1964년 자리 잡은 삼천리연탄과 1970년대 수색으로 이전한 삼표연탄, 대성연탄, 한일연탄 등이다. 이로 인해 수색역 주변의 수색동과 증산동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까마귀 동네’로 불렸고, 서울에서도 유독 목욕탕이 많은 동네였다. 이후 은평은 뉴타운 등 현대적 주택들이 건설됐고, 통일시대에 국제화물 운송의 거점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1970년대 구로공단 여성근로자들. 서울산업단지 제공
구로에는 수출산업의 메카 구로공단이 있었다.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은 1970∼80년대 수출의 10%를 감당할 정도였다. 1976년 만들어진 가리봉 시장은 구로공단 노동자의 일상과 문화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가리베가스’(가리봉+라스베이거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구로공단 설립 과정에서 공단터가 된 분배농지를 국가가 검찰을 동원해 농민들에게 빼앗았고, 여공들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의 성지이자 노동문학이 태동한 구로공단은 현재 디지털단지로 바뀌었고, 가리베가스는 옌볜 거리로 바뀌고 있다.

논밭이던 강남은 서울 최고의 부촌이 된다. 1960년에서 1970년 사이 서울 인구가 두 배 가까이 급증하면서 강남 개발이 시작된다. 지금은 강남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 중간’이라는 뜻으로 ‘영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 개발계획의 정식 명칭도 ‘영동 개발’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체비지 장사에 몰두하면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강남 유인 정책과 강북 억제 정책은 되레 지금의 아파트와 사교육으로 대변되는 ‘강남공화국’을 만들게 됐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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