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생의 슬픈 찬가..온갖 고생 다 했는데 벌써 떠밀리나

명순영, 김경민 2021. 11. 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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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없이 책임 넘치는 '평생 실무자'
MZ에 밀려 사라지는 '물세대' 자조감

네이버 새 사령탑으로 1981년생 최수연 글로벌사업지원 책임리더가 내정됐다. 네이버에 합류한 지 채 2년밖에 되지 않은 MZ세대(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과 Z세대)다. 한성숙 현 네이버 대표가 1967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1970년대생(만 42~51세)을 단숨에 ‘건너뛰어버린’ 셈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970년대생은 재계를 이끄는 핵심으로 주목받았다. 중간관리자 역할을 담당했고, 고위 임원으로 중용되는 사례도 많았다. 물론 여전히 조직에서 맹활약 중인 1970년대생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올해 들어 특히 MZ세대에 밀려 소외감을 느낀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60년대생이 누려왔던 실질적인 권한은 이어받지 못하고, 대신 책임만 늘어난 채 막중한 실무에서 떠날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불만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생을 ‘꼰대’라고 치부하는 MZ세대 눈치를 봐야 하는, 진정한 ‘낀 세대’가 됐다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

1976년생 A씨가 2000년대 초반 국내 최고 중공업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겪은 일이다. 30대 중반인 과장급 선배가 부서 막내 A씨에게 조용히 구두를 벗어줬다. 닦아 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군대 문화’를 떠올렸다. 저 멀리서 ‘커피 한잔’을 외치면 냉큼 봉지 커피를 타 갔다. ‘저녁 먹자’는 한마디에 선약을 취소하고 선배를 따라가 ‘술 시중’을 들었다. 40대 초반인 부장에게는 이런 서비스(?)가 당연했다. 부장은 또한 실무를 전혀 뛰지 않았다. 출근해 커피 한잔과 함께 신문을 천천히 읽고, 종종 윗사람에게 보고만 하면 업무는 끝이었다. 자유분방한 X세대라고 자부한 그는 ‘불합리하고 사라져야 할 문화’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따랐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A씨는 몇 번의 전직을 거쳐 중견 바이오 기업 경영기획 임원이 됐다. 최근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A씨는 후배에게 개인적인 일을 전혀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주장이 강한 MZ세대 눈치를 본다고 했다. “점심 같이하자” 해도 “약속 있다”며 가볍게 거부하는 후배가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원이라 해서 실무를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회계·인사 등 담당 직원이 있어도 적잖이 실무에 참여한다.

“후배에게 구두를 닦게 하거나 커피를 시키는 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옳지 않죠. 그렇다고 직장생활 20년 가까이 한 지금, 후배 눈치를 보고 살 줄은 몰랐습니다. 또한 경험이 쌓이고 직급이 오르면 실무를 떠나 권한과 책임을 갖고 의사 결정만 하면 될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실무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마감할 것 같은 생각까지 듭니다.”

▶X세대서 MZ세대로 중심축 이동

▷삼성전자서도 1980년대생 6명 ‘별’

A씨는 1970년대생, 이른바 X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90년대 대학을 다닌 X세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재계 인사의 키워드였다. 지난해 한화그룹에서는 김은희 한화역사 대표 등 1970년대생 CEO 3인방이 탄생했다. LG그룹 인공지능 연구 전담 조직인 ‘LG AI연구원’ 원장을 맡은 배경훈 상무는 1976년생으로 올해 전무로 승진했다. LG는 전체 임원 중 1970년대생 비중이 지난해 말 기준 41%에서 올해 말 기준 52%로 절반을 넘어섰다. 지난해 롯데그룹은 신임 임원 총 50명 가운데 45명(90%)이 1970년대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X세대에 대한 주목도는 확연히 떨어졌다. 벌써부터 MZ세대가 치고 올라오자 X세대는 ‘낀 세대’로 기업에서 ‘순삭(순간 삭제)’될 것 같다며 조바심 내는 모습마저 엿보인다.

실제 MZ세대인 1980년대생이 국내 간판 기업 임원으로 빠르게 올라섰다. 이제는 ‘깜짝’ ‘파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무색할 정도다. 국내 시가총액 50위 내 기업에서 1980년대생 임원은 50명에 달한다. 지난해 3분기 31명에서 1년 새 60% 증가했다. 1981년생 최수연 대표를 새 사령탑으로 내정한 네이버는 1980년대생 임원이 14명이나 된다. 120명의 책임리더(임원) 가운데 30대도 6명이나 된다.

국내 대표 기업 삼성전자도 1980년대생 6명이 ‘별’을 달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981년생이 가장 어린 임원이었다. 현재 1985년생(김태수 삼성글로벌리서치 시큐리티팀 상무)으로 한층 더 젊어졌다. 미래에셋증권은 신규 선임된 팀·지점장 중 1980년대생 비율이 33%에 달했다. 50명의 임원 승진자 가운데 1980년생이 8명이나 됐다. ‘밀레니얼’세대 임원이 기업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른 인사로 풀이된다. 연륜이 강조되는 사외이사조차 1980년대생이 중용된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ESG위원회를 꾸리며 1983년생 김태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를 사외이사로 임명했다. 한국전력은 1987년생 방수란 서울에너지공사 고문변호사를 사외이사 명단에 포함했다.

또한 X세대는 평생 실무만 하다 직장생활을 마감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내비친다. 국내 메이저 카드사에 근무하는 1972년생 B씨는 팀장 타이틀을 단 지 벌써 4년째다. 한국 나이로 50세지만 업무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금 조달 업무를 맡아온 그는 과장 때나 지금이나 하는 일은 똑같다. 팀장으로서 실무에서 손을 떼기를 기대했으나 뜻대로 안 됐다. B씨는 “업무는 늘어만 가고 인력 충원이 되지 않아 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며 “권한은 없고 팀장으로서 책임만 추가되는 분위기라 때로는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1973년생인 대학병원 병리학 전문의는 “전공의 때 하던 일을 그대로 한다”고, 동갑인 부장검사는 “평검사, 차장검사장에 치여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X세대는 어떤 세대기에

▷경제적 풍요 누렸지만 ‘낀 세대’ 전락

X세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했다’는 설명이 붙는다. X세대는 산업화 수혜를 입은 산업화세대(1940~1954년생)와 1차 베이비부머세대(1955~1964년생) 부모 품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10대까지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1990년대 초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을 소비하며 ‘신세대’로 화려하게 등장했고 대학 시절 삐삐, 휴대폰 등을 사용한 경험으로 스마트폰 시대 전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SNS 활용에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막상 사회 진입 과정은 만만찮았다. IMF 외환위기와 닷컴 버블 붕괴를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취업에 좌절을 겪은 세대기도 하다. 외환위기 속 치열한 경쟁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성실함을 무기로 사회의 일원으로 우뚝 선다. 결혼, 출산으로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자산 축적에도 성공한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X세대는 전 세대 중 가장 빠르게 자산을 늘린 세대다. 2012년까지만 해도 1억9324만원 자산을 보유했는데 지난해 4억571만원으로 급증했다.

X세대가 모든 세대 중 소비력이 가장 왕성한 세대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명품 매출에서 4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3%로 지난해(25%)보다 5.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20~30대 명품 구입 비중이 감소세를 보인 것과 대비된다.

물론 X세대의 고민도 많다. 산업화 시절을 겪은 부모 영향을 받아 ‘평생직장’을 목표로 조직에 충성했지만 정작 사내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크다.

X세대는 기성세대의 군대식 문화를 겪으면서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사생활을 희생해온 데다 직장 내 불공정한 대우가 적지 않았음에도 ‘사회생활은 원래 이런 것’이라며 침묵하고 묵묵히 이겨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충성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X세대는 어느새 조직의 중간관리자나 팀장급으로 성장했지만 과거 선배들이 누렸던 대접은 온데간데없고, 조직원인 MZ세대로부터는 ‘젊은 꼰대’ 소리를 듣기 일쑤다. 온갖 실무를 도맡아 하고 조직 관리까지 하면서 신구세대 갈등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한마디로 ‘낀 세대’ 신세다.

▶기업 조직문화 180도 달라져

▷MZ세대 주역 부상하며 찬밥

X세대가 실무형 ‘낀 세대’로 전락한 이유는 뭘까.

기업 조직문화가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보수적이면서 연공서열에 치중해온 기업 문화가 사라지고 철저한 성과주의 문화가 자리 잡는 분위기다. 단순한 직급이 아닌 역할을 중시하는 수평적 조직 제도가 도입되면서 능력 있는 MZ세대 몸값이 높아지고, 오랜 경력과 성실성만을 무기로 내세운 X세대 포지션이 애매해졌다.

일례로 지난 3월 임금을 9% 인상한 LG전자는 10월 성과급 체계를 개편했다. 사업 부문별이 아닌 회사 전체 매출, 영업이익을 적용해 사업 부문별 성과급 격차를 줄이고, 성과급 규모도 늘리기로 했다. 그동안 임금 인상이 보수적이었던 LG전자가 파격적 임금 인상, 성과급 체계 개편에 나선 것은 MZ세대가 주도해 결성한 LG전자 사무직 노조 출범, 목소리를 높인 영향이 컸다. SK하이닉스도 MZ세대 인재 유치를 위해 대졸 신입사원 초임을 기존 4000만원대에서 5040만원으로 대폭 높이기로 했다.

기업 임금 인상, 인사 제도 개편을 바라보는 1970년대생 속내는 편치 않다. 비용 부담이 커진 기업들이 차장, 팀장급 연봉까지 신입사원과 같은 폭으로 올려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MZ세대 못지않은 성과를 내기도 만만찮다. X세대는 기업이 신성장동력으로 추진하는 각종 신기술 트렌드에 뒤처지면서 이렇다 할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로는 산업화 수혜를 누리며 비로소 실무에서 벗어난 베이비붐세대, 아래로는 제 목소리를 높이는 MZ세대의 중간에 끼면서 점차 존재감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70년대생이 운다’ 저자 박중근 캠프코리아 대표는 “1970년대생이 실무와 조직 관리 역할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급과 권한이 올라갈수록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조직 관리를 핑계로 실무를 하지 않았던 과거 상사들이 잘못됐을 뿐이다. 조직 경영 수준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지는 과정에서 1970년대생이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라고 진단했다.

1970년대생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거 선배의 ‘기득권’을 그리워하지 말고 1980~1990년대생과 함께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3년생 한 증권사 리서치본부장이 SNS에 쓴 글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난해 말 ‘X세대 임원이 온다’고 했는데 올해 ‘1980년대 임원’이 왔다. 10년 차이가 1년 차이로 축소됐다. 급격한 ‘Passing 1970’ 분위기가 감지된다. 디지털, 친환경, 나아가 메타버스 시대 1970년대생은 이해력이 낮은 꼰대 취급받기 딱 좋다. MZ세대에 대한 공감능력은 무조건 1980년생의 승리다. X세대는 IMF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직장이 평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안다. 1960년대생 장기 집권에 순종했고 아래 직원 당돌함에 꾹 참았는데, 패싱하고 바로 1980년대생이란다. 이제 1970년생끼리 경쟁이 아닌, 1980년대생을 동일 그룹으로 놔야 한다. 1970년대생이 그만큼 깨어 있고 새로운 것들로 무장하지 않으면 언제든 짐 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관리는 기본이고 실무에서 손을 놔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명순영 기자, 김경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6호 (2021.12.01~2021.12.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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