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여경은 빠져있으라' 경찰 내부 배려가 혐오 키웠다"

김판 2021. 12. 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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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 무용론은 시대착오적 논쟁"
"남녀 갈등 아닌 성평등 개혁에 대한 저항이자 반발"
경찰 용역 연구 최종 검토 단계


경찰이 최근 수행한 연구 용역에서 조직 내 ‘배려’라는 온정적 성차별주의가 여성 경찰을 배제하는 한편, 젊은 남성 경찰들의 ‘역차별’ 반발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또 ‘여경 무용론’을 “시대착오적 논쟁”으로도 규정했다.

국민일보가 1일 입수한 경찰청의 ‘여성 경찰 혐오 담론 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용역 중간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팀은 여경 무용론 논란을 “시대착오적 논쟁”으로 결론 내렸다. 보고서는 “‘남성에 비해 열등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여성’을 전제로 과연 여성이 경찰 직무에 적합한지를 둘러싼 시대착오적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며 “남녀 간의 감정적 대립이나 갈등의 산물이 아닌 ‘성평등 개혁에 대한 저항이자 반발’”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경찰청은 지난 6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해당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연구팀은 2015년 1월부터 지난 7월까지 여경과 관련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 2만 657건과 뉴스 기사 2326건을 추려 빅데이터를 분석했다. 만 34세 미만 청년 경찰 41명과 관리자 6명 등 총 47명의 경찰관에 대한 초점집단 인터뷰(FGI)도 진행돼 현장 경찰들의 여경 인식에 대한 문답도 포함됐다.

보고서는 여경 혐오가 2017년 추진된 경찰 조직 내 성평등 개혁을 계기로 불거졌다고 지적했다. 경찰 내부에서 여경 확대 논의가 시작됐을 무렵부터 여경과 관련한 게시글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를 두고 ‘여성 경찰 확대 방침에 대한 반등’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가운데 2019년 5월 이른바 ‘대림동 사건’이 여경 논란에 불을 지폈다고 연구팀은 봤다. 당시 여경이 주취자를 제압하는 일부 과정이 담긴 영상이 온라인에 퍼졌는데, 네티즌들은 여경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했다. 반면 경찰은 전체 영상을 공개하며 현장 대응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해당 논란 이후 여성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기사가 크게 늘었고 여성 혐오 담론도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내 조직 관리자 대부분이 중년 남성인 상황도 여경 무용론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 관리자들이 여경을 ‘배려’한 것이 오히려 젠더 갈등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배려’가 여경들에게는 ‘배제’로, 젊은 남경들에게는 ‘여성에 대한 특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경 응답자들은 보고서에서 “중요 사건 현장에서 여경을 뒤로 물러서 있게 하거나 변사체 접근을 막는 행위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한 여경은 “오히려 먼저 나섰을 때 혼났다. ‘네가 먼저 나서서 다치게 되면 우리가 다 문제가 된다. 조금 빠져 있으라’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토로했다. 보고서는 “‘여성 배려’가 조직 내에서 여경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남성 경찰 ‘역차별론’의 근거로도 활용된다”고 지적했다.

여경 혐오는 논란에 그치지 않고, 경찰 서비스 질 저하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여경의 현장 대응 장면을 시민들이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등 관심이 집중되면 오히려 주변을 의식해 불필요하게 억압적인 방식의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여경은 연구팀 인터뷰에서 “주변에서 카메라를 켜면 물리력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할 것 같고, 그런 걸 의식하느라 신고처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다른 응답자는 “실제 신고 현장에서 주변의 남성 시민들이 ‘오또케 오또케’ 희롱하면서 지나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또케’는 여경들이 현장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어떡해’만 남발한다고 비하하는 내용이 담겼다.

연구를 수행한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조교수는 “청년 경찰관들은 전통적인 성역할 규범을 고수하지 않는다”며 “여성 경찰관을 온정의 대상으로 보되 참여 기회를 제약해 온 기존의 성별 직무 분리 관행을 개선하는 게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빅데이터 분석을 한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대국민 홍보를 통해 정형화된 여경의 이미지를 탈피해야 한다. ‘여성’이 아닌 ‘경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노출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찰청은 지난 30일 경찰청에서 열린 ‘젠더 의제 토론회’에 참석해 연구 용역 결과를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토론회에 참석했던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경찰청 차원에서 여경 혐오 담론은 경찰 전체 사기를 떨어트리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공적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보고서는 이달 내로 경찰청에 최종 제출될 전망이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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