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오거리 터줏대감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 김종분씨 "지금도 귀정이 모습 선한데 어찌 떠나겠노"

글·사진 김기범 기자 2021. 12. 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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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1년 5월25일, 악몽의 그날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다
경찰의 진압에 스러져간 둘째딸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 김종분 할머니가 지난달 29일 서울 왕십리 오거리 노점에 앉아 웃음 짓고 있다. 김기범기자

“귀정이가 길 건너에서 ‘엄마’ 하고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11번 출구를 나와 2~3분 걷다보면 행당동 상점가 입구에 자리 잡아 어느새 왕십리 오거리의 풍경 속에 녹아든 노점들을 만나게 된다. 채소, 꽃, 옷 등을 파는 노점들 중에는 33년째 자리를 지키며 왕십리 오거리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김종분 할머니(83)의 노점이 있다. 그의 노점엔 각종 채소와 떡, 삶은 옥수수 등 간식거리가 즐비하다.

지난달 29일 오후 왕십리 오거리 노점에서 만난 김 할머니는 여든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계속 장사하는 이유에 대해 “정이 들어서 고향 같은 곳”이자 “먼저 떠나보낸 둘째딸 김귀정 열사(당시 26세)를 기억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딸이 과외 갔다 오면서 저쪽 길 건너에서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곤 했어. 과외가 늦게 끝나서 택시를 타고 와서는 차비 좀 달라고 하는 거야. 내가 가서 택시비 내주면서 ‘엄마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무턱대고 왔어?’라고 물으면 귀정이가 ‘엄마는 항상 여기에 있잖아. 엄마는 결근을 안 하니까’라고 말했어.”

김 할머니는 30년 전 세상을 떠난 딸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의 둘째딸 김 열사는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 충무로 골목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했다.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김 열사는 시위 도중 쓰러진 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뒀다.

그해 봄은 노태우 정권의 학생·노동자 시위에 대한 폭력진압과 공안통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다. 1991년 4월26일 경찰에 맞아죽은 강경대 열사를 시작으로 5월25일 김 열사까지 한 달여 동안 11명이 경찰의 폭력 또는 투신 자살로 사망했다.

김 열사의 죽음은 평범한 노점상이던 김 할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는 1991년 죽어간 다른 노동자, 학생들의 장례식을 포함해 여러 시위 현장에 참석하면서 딸의 뒤를 이어 민주화 운동가로서 살아왔다.

“내가 원래 노태우 찍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 딸이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했잖아. 그러니까 딸 죽었을 때 내가 ‘네가 하다 못한 거를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할게’라고 했어. 귀정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대학생,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을 만났겠어. 다 귀정이가 만나게 해준 거야.”

1991년 6월12일 김귀정 열사 장례식에서 열사의 영정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인간띠를 만든 대학생들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33년을 견딘 할머니의 노점은
이 동네 사람들의 오랜 ‘사랑방’
“다큐 ‘왕십리 김종분’ 개봉 이후
딸을 기리는 사람들 발길 이어져
고향 같은 이 자리 내가 지켜야지”

딸이 만나게 해준 인연들은 지금도 왕십리 거리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김 열사의 대학 동문들을 포함해 김 할머니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만났던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노점을 찾아오곤 한다.

지난달 11일 개봉한 김진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김 할머니의 노점에 새로운 인연들이 찾아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왕십리 김종분>은 김 열사와 김 할머니, 그 가족들과 인근 상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지난달 29일 밤엔 왕십리 오거리 근처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20대 청년이 노점으로 찾아와 ‘이런 사연이 있으신 줄 몰랐다’면서 삶은 옥수수를 사갔다.

<왕십리 김종분>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대체로 막을 내렸지만 뜻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단체관람이 이어지고 있다. 성균관대 동문들의 기부로 진행되는 무료 관람 릴레이 캠페인 ‘쏜다’와 시민사회단체의 단체관람 등 주로 김 열사를 추모하고자 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상영회가 이어지고 있다.

33년을 견뎌낸 김 할머니의 노점은 인근 행당동에 오래 거주한 이들에게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또 마트에 들를 시간이 없는 바쁜 이들이 퇴근길에 저녁 반찬거리를 사가는 ‘거리의 슈퍼마켓’이기도 하다. 김 할머니는 마트와 달리 1000원, 2000원어치의 채소도 팔고, 잔돈이 없다는 이들에게는 선뜻 외상도 준다.

김 할머니는 “외상해 놓고는 안 오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해. 또 몇 년 지나서 외상값 갚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라고 말했다.

30년 넘는 노점상 생활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구청의 단속으로 천막이 철거당한 것만 다섯 번이다. 10여년 전 자식들 덕분에 미국 여행을 떠나는 날 구청 직원들이 천막을 철거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칠까봐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다. 한때 노점을 못하도록 막아섰던 성동구청과의 관계는 최근 <왕십리 김종분>을 구청 직원들이 단체관람할 정도로 달라졌다.

인천에서 왕십리로 이사온 지 어느덧 50여년. 김 할머니와 그 가족에게 이제 왕십리는 제2의 고향이 됐다. 김 할머니는 “장사 30년 하니까 이 동네 사람이 다 내 식구 같아”라면서 “앞으로도 건강한 동안은 계속 장사해야지”라며 웃음을 지었다.

글·사진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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