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차별과 저발전.. 호남이 중층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김소연 입력 2021. 12. 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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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중산층 사회' 저자 조귀동 신간  '전라디언의 굴레'
호남은 '전라디언'의 굴레를 벗을 수 있을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달 10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반대하는 시민들에 막혀 묵념으로 참배를 대신하고 있다. 광주=이한호 기자

"호남은 불균등 발전의 희생양이었다. 산업화라는 로켓에 탑승하는 걸 거부당하고, 차별과 모멸을 받고, 거대한 국가 폭력에서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되는 과정은 기실 한 사회의 '어둠'을 한 지역에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촘촘하게 분석한 첫 단독 저서 '세습 중산층 사회'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조귀동 작가가 예민한 '호남 문제'를 두 번째 책 주제로 택했다. 호남은 선거 때마다 '민주화의 성지'로 추앙받으며 소환되지만 살림은 넉넉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의 '낙후'와 '배제'를 직접 언급하는 것은 터부에 가까웠다. 하지만 호남 출신인 저자는 한국 사회가 쌓아 올린 모순이 집약된 호남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책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전라디언'은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호남에 대한 멸칭이다. 책은 호남을 옭아맨 여러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 '전라디언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일단 호남 차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라는 게 책의 전제다. 저자는 지난 2018년 아르바이트 채용 공고를 올리면서 전라도 출신을 배제한다는 내용을 넣어 논란이 됐던 한 프랜차이즈 편의점 등의 사례를 들어 호남 차별을 인종 차별에 비유한다. 미국에서 차별받는 이민자 집단처럼, 근대화와 대규모 인구 이동 속에 호남인은 서울 등지의 하층 노동자로 편입되면서 부정적 시선에 놓이게 됐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 같은 독특한 호남인 정체성의 태동을 찾아 산업화가 시작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기업·자본의 성장과 함께 자본에 대한 배분권을 쥔 것은 정치 권력이었다. 기준은 '지연과 학연'이었다. 특히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핵심은 TK(대구·경북)였다. 호남 출신은 한국의 고성장이 만들어낸 각종 기회에서 소외됐다. 엘리트 사회의 전라도 출신 배제와 더불어 1960년대 이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현대시장 일대, 관악구 봉천동·신림동 등 전국으로 흩어져 도시 빈민의 역할을 맡게 된 호남 사람은 '전라도 출신'이라는 낙인 찍기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 1980년 5·18은 가뜩이나 차별을 겪은 호남인에게 스스로가 '비극민'임을 깨닫게 해 준 계기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달 26일 호남 민심 탐방 일정 중 전남 목포시 동부시장에서 상인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여기까지만 보면 호남 출신 저자의 현실 한탄인가 싶지만 책은 오히려 호남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치 영역의 호남 차별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문제는 엘리트 사회의 지분이 늘었어도 정작 평범한 호남 사람이 받는 혜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짜 호남인'이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의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면서 호남 내부의 분화와 이해관계의 대립이 발생한 것이 오늘날 '호남 문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호남은 산업과 경제 구조, 부패와 무능, 취약한 지역 정치 구조와 거버넌스(관리체제) 등 여러 면에서 지역민의 입장과 시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지난 6월 학동 철거 건물 붕괴사고의 경우 불법적 하도급 문제라는 언론 분석 등과 달리 광주 시민들은 토건 비리에 의한 것으로 지적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시작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 등 자생적 발전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이뤄진 정치 권력의 시혜성 사업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장 광주 시민들은 '광역시 중 유일하게 복합쇼핑몰이 없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지역 상인의 표를 의식한 지자체는 인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제대로 견제받지 못하는 거버넌스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부패와 무능이 지역 경제·사회 발전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저자는 호남이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 받던 시절에 형성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익숙함과의 결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호남의 중층적 모순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담론을 지역민이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호남 몫'을 받아내는 엘리트 정치 대신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고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는 진짜 지역 정치를 외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덧붙인다.

풍부한 문헌 자료와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호남 문제'를 정교하게 뜯어본 책이다. 호남의 저발전 원인으로 '지역의 주변부화', '지방지배체제의 균열' 등을 꼽고 '거버넌스 개혁'을 강조한 후반부는 '지방소멸론'에 흔들리는 다른 지역에 대한 분석과 대안 제시로도 손색이 없다.

전라디언의 굴레·조귀동 지음·생각의힘 발행·288쪽·1만7,000원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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