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 글씨체의 아름다움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유지원 입력 2021. 12. 3.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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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씁니다] 남성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영역에 '있습니다'. 여성 전문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영·정조대에 완성된 한글 궁체는 한글 글씨체의 역사에서 무척 중요하다. 한글은 문자사뿐만 아니라 여성사적으로 의미 있는 계보를 갖고 있다. 궁체의 직계와 방계를 살핀다.

세종대왕은 한글로 글씨를 잘 썼을까? 시기가 아직 일렀다. 세종이 발명한 것은 문자의 기하학적인 체계였다. 인쇄 활자로 출발한 이 문자에서 붓으로 쓴 모범적인 글씨의 양식이 만개하는 데에는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세종 이후 30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한글 글씨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은 영정조대에 완성된 한글 궁체다. 한글 창제는 왕실의 프로젝트였고, 조선 왕실에서는 한글로 문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글씨 훈련을 받아 숙련된 지밀 상궁(임금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모시는 상궁)이 때로 글씨를 받아쓰는 비서 역할을 한다. 이들을 서사 상궁이라 부른다. 궁에서 궁녀들에 의해 발달한 글씨라서 궁체라고 하며, 이 궁체를 오늘날 폰트로 만든 것이 궁서체다.

궁체는 왕실의 안부 편지에서 시작했고, 조선 후기에 소설이 유행하며 소설 필사를 통해 궁 밖에까지 널리 퍼져 나간다. 세종의 한글 창제부터 궁체 서법이 만개하는 영·정조까지의 흐름 속에는 두 명의 편지 수취인이 전수자 역할을 한다. 효종의 딸이고 현종의 누이이자 숙종의 고모인 숙휘공주와 숙명공주다. 이들은 가족인 왕과 왕비, 왕족들로부터 3대에 걸쳐 받은 한글 편지들을 잘 보관했고 그 자손들이 이 귀중한 자료를 전수한다.

한글 궁체가 글씨와 폰트로 이어지며

영·정조대 이후의 중요한 전수자로는 사후당 윤백영을 꼽을 수 있다. 한글 서예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호적상 증손녀다. 가문이 소장한 한글 편지와 서책들이 윤백영에게 모였다. 서예가인 윤백영은 100세 가까이 살면서 전통 서예를 현대 서예에 잇는 가교 구실을 했다.

궁체를 이어받으면서 현대 한글 서예의 기틀을 잡는 데에는 갈물 이철경과 꽃뜰 이미경 자매가 큰 공헌을 했다. 또 다른 자매인 봄뫼 이각경은 북한의 한글 서예에 족적을 남긴다. 갈물의 이름을 딴 갈물한글서회는 여성 회원들만으로 이루어졌고, 작품과 교육과 학술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한글 궁체의 직계 계보다.

글씨인 한글 궁체 계보의 방계에는 폰트가 있다. 같은 글자를 대상으로 해도, 글씨를 다루는 서예계와 폰트를 다루는 디자인계는 서로 분야가 달라서 그간 서로 연결되어오지 않았다.

폰트 말고 또 하나의 방계를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일상 속 생활 글씨체다. 이 중 궁체의 필법을 골격으로 하면서 붓 아닌 현대 필기구인 펜으로 쓴 글씨들이 있다. 그중 하나인 박도연의 글씨는 그저 양식을 학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활력을 실어낸다. 궁체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 속에도 녹아들어 이어져오고 있다.

한편 글씨를 폰트로 이어가는 것은 일종의 번역이고, 번역에는 품질이 있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출발어인 영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한 의역을 거쳐 도착어인 한국어를 매끄럽게 구사해야 하는데, 꽃뜰 이미경체 폰트와 갈물 이철경체 폰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폰트로서는 너무 직역되었다. 출발어가 도착어를 압도해서 그렇다. 교보 손글씨 2020 박도연체 폰트는 그보다는 ‘의역’되어 있다.

글씨를 기반으로 한 폰트 디자인의 모범적인 예로 류양희의 고운한글바탕을 꼽고 싶다. 구글 폰트에서 내려받아 쓸 수 있다. 류양희의 연필 글씨는 궁체는 아니지만 단정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폰트 디자이너로서 본인의 글씨를 씨앗 삼아 범용성 높은 폰트로 만드는 과정에는, 그저 닮은 데에 그치지 않는 하나의 해석 단계가 더 필요하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폰트의 최종 환경인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에 적합하도록 글자 공간을 정돈하는 단계다. 이때 폰트는 글씨와 다소 달라지는 해석과 의역을 거친다. 디자이너와 일반 사용자들이 고운한글바탕 폰트를 선택해서 널리 사용하는 데에는 바로 이 과정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류양희의 고운한글바탕 폰트는 이로써 글씨의 단순 번역본을 넘어 원본의 지위를 획득한다. 폰트가 글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 완결성을 지닌다. 닮아야 한다는 초상화적 강박을 초월한 이 폰트는 이제 폰트 디자이너의 직업적인 의지와 이상이 담긴 내적 자화상이 되어 있다.

한글 궁체를 직계와 방계로 연결해보니 전통과 현대, 글씨와 폰트가 이어지며 한층 풍부해졌다. 한글이 한자보다 홀대를 받아 생긴 일이었고 중요한 남성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만으로 완결성 높은 계보를 쓸 수 있는 문자는 한글 말고는 드물다. 문자사뿐 아니라 여성사적으로 의미 있는 계보를, 한글은 갖고 있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글문화연구소 소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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