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PPL, 생뚱맞은 복장..2% 부족한 '지리산'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드라마 ‘지리산’ 포스터, 화면 캡처 2021. 12. 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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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지리산> 이것이 아쉽다
국립공원의 입장만 대변, 등산인과 주민을 부정적으로 묘사해 동호인들 비판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등산 코스를 단 하나만 얘기해야 한다면, 지리산 종주가 꼽힐 것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시작으로 주옥같은 봉우리들을 거쳐 클라이맥스인 천왕봉에 올랐다가 중산리로 내려서는 36km 여정이 산꾼의 통과의례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지리산이 꽉 막힌 인생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시절도 있었다. 사회생활하며 이리저리 치여 더 이상 가슴이 버텨내지 못할 때 큰 배낭을 꾸렸다. 어둠이 내린 용산역에는 비슷한 등산복 차림의 근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밤 열차 안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창밖에 두고 있었다. 정년이 가까운 무궁화호 승무원은 이들의 복장과 표정만으로도 구례구역에 내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새벽 3시 구례구역만큼 부산한 곳이 있을까? 일부는 새벽 장사를 하는 역 앞 국밥집으로, 일부는 곧장 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일부는 택시를 타고 화엄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게 흩어진 이들은 다시 만날 이들이었다. 며칠간 지리산 종주를 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혹은 대피소에서 식사를 하다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며칠을 무한정 펼쳐지는 산그리메를 보면서 어느새 누군가를 용서하기도, 무언가를 내려놓기도 하면서 치유의 과정을 겪었다. 산꾼들이 지리산을 ‘어머니 산’이라 하는 건 넓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살다가 더 이상 가 닿을 곳 없는 벼랑 끝에 서있다고 여겨졌을 때 그 산에 가면 모든 걸 품어 주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거나, 며칠 만에 지혜로워져서 다른 삶을 살지는 못하겠지만, 지리산이 갖는 부드러운 능선에 위로 받고 돌아오곤 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주능선에 구간별로 대피소들이 있어, 별다른 장비 없이 편하게 대피소에서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한몫한다. 특히 추석이나 설 연휴에 결혼하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노총각 노처녀들이 지리산 종주를 하다 인연이 되어 결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페인에 산티아고순례길이 있다면 한국에는 지리산 종주 코스가 있는 셈이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일시적으로 대피소 숙박이 중단된 상태다
이런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지리산이 처음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많은 등산인들이 관심을 가졌다. 평소 TV드라마와 담 쌓은 이들의 입에서도 “기대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총 16부작 중 절반가량 방영한 11월 중순 기준, 등산인들의 ‘지리산’ 드라마에 대한 감상평을 들어보았다.
미국의 3대 장거리 트레일을 모두 완주한 ‘트리플 크라우너Triple Crowner’ 부부 양희종·이하늘씨, 특히 이하늘씨는 올해 여름 백두대간 700여 ㎞를 일시종주로 13일 9시간 11분 만에 주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산행에 있어서는 초고수인 이들 부부의 감상평을 들었다.
“1~2회만 봤다. 더 이상 보지 않은 이유는 출연 배우의 연기력 논란, CG, 과도한 PPL 이런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처음 이 드라마가 나온다고 했을 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산과 산을 통해 연결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리산이 공포스러운 장소처럼 비쳐져서 거리감이 생기더라.
물론 산이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함부로 정복하지 못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있는 것이지 사람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지리산과 산악구조대, 사람과 자연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등산 매거진 기자와 트레일러닝 매거진 편집장을 역임한 윤성중씨는 “지리산에 저렇게 액션을 취할 만한 바위 절벽이 있을까 싶다”며 “바위절벽이 있어도 일반인은 거길 오를 생각을 못 할 텐데, 그리고 굳이 절벽에서 줄을 타고 내려올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부자연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지리산이 흙이 많은 부드러운 산세를 감안하면 바위가 있다 해도 우회해서 돌아내려오는 게 훨씬 안전하고 쉽다는 것. 그는 “이런 류의 생각이 장면과 장면마다 들어서 몰입감이 깨져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밝혔다.
개인 블로그와 인터넷의 각종 게시판을 확인한 결과 가장 많은 지적 중 하나는 과도한 PPL(제품 노출광고)과 비현실적인 복장이었다. 상당수 등산인들은 무릎관절과 인대, 연골 손상을 막기 위해 스틱을 사용해 산행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출연자들은 항상 스틱을 배낭에 꽂은 채 다닌다는 것. 스틱을 사용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국립공원 직원이 스틱을 엉터리로 잡은 것도 소위 몰입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꼽혔다.
특히 구조를 위해 출동할 때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올라야 하는데, 극도로 숨 가쁜 산행에서도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재킷 지퍼를 끝까지 채운 복장도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또 육산인 지리산 특성상 하강기를 사용할 곳이 거의 없는데 하네스(안전벨트)를 차고 산행하는 장면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도시에서 어울릴 만한 코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산행하는 것도 지나친 PPL이라 비판하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인지 가장 많은 의견 중 하나가 “1시간짜리 아웃도어 광고”라는 식의 평가였다.
제작진의 실수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오른 출연진들 인물 영상 뒤편으로 보이는 표지석의 ‘中峯중봉’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 표지석의 글자 형태나 모양을 감안해 유추하면 무등산 ‘중봉’ 표지석이라고 네티즌들은 결론 내렸다. 무등산 중봉은 부근에 방송국 송신소가 있어 허가 받은 차량은 오를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이 중봉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국립공원 지원 받은 국립공원 홍보영상?
등산인들이 단순히 지적을 넘어 분개하며 드라마를 ‘못 보겠다’고 한 건, 지나치게 국립공원 공단 입장만 대변하는 스토리인 탓이다. 에피소드 중에는 공단 직원들과 현지 주민들의 갈등을 그린 것도 있는데 주민들을 악독하게 그린 것. 본지 서현우 기자는 “자기 땅임에도 제대로 재산권 행사를 못 하는 답답한 심정과 입장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국립공원 입장만 대변한 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오영훈(서울대농대산악부OB)씨는 “야생동물 뱀에 관한 내용이 방영될 때 보았는데, 국립공원을 미화한 시각 자체가 좀 불편했다”며 “야생동물은 무조건 보호할 가치가 있고, 주민들은 비합리적으로 묘사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은 좀 편파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국립공원만이 정답이 아니라 보호를 위한 여러 방안, 즉 스펙트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으로 소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야생동물 보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고 현장 상황, 주민들의 현실, 정부정책, 기업, 등산문화 등 다방면을 고려해서 정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공원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의 말도 들어보았다.
“레인저들의 모습을 조금 과장되게 묘사 했지만, 마침 산불방지기간이라 산불에 관련된 드라마 내용은 적절했다고 본다. 실제 저도 조난자가 보낸 사진 한 장으로 위치를 추측해 구조한 적이 있기에, 완전히 허황된 내용은 아니다. 긴급 상황에서 국립공원 직원들은 지형을 잘 알고 있기에 사고 장소로 빠르게 출동해 대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김은희 작가는 지난 11월호에 실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리산은 부드러운 흙산이니까 천왕봉까지 갈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결국 중간에 조난(?)을 당했다”며 “사실 노고단도 성삼재까지 차를 타고 가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올랐는데, 그것도 너무 힘들어 죽을 뻔했다”고 답한바 있다. 등산 초보자가 아닌, 등산 문외한에 가까운 셈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속의 등산객은 산불을 일으키고, 조난당하고,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비윤리적인 이들로 그려지는 것이 태반이다. 1980~1990년대에는 등산객들과 행락객들이 산에 쓰레기 버리고, 계곡에서 고기 굽고, 음악 틀어서 춤판 벌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10%라면, 80%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10%는 산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다. 자연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좋아졌고, 발전했다. 20~30년 이전과는 수준이 다르다.
드라마 준비 과정에서부터 국립공원 TF지원팀이 꾸려질 정도로 대대적인 지원을 했기에 국립공원의 입장이 대변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000만 등산인들의 어머니 산 지리산에서 위로 받고, 감동 받고, 행복했던, 국립공원이 생기기 전부터 지리산을 누볐던 산을 사랑하는 등산인들을 불한당처럼 그린 것은 안타깝다. TV 드라마가 극적인 요소를 확대해 흥미를 이끄는 것은 맞지만, 등산인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지리산이 위험한 사건사고의 현장으로 매도되는 것 같아 아쉽다.
대부분의 등산 동호인 게시판에는 ‘지리산’ 드라마에 대한 비판 글 일색인 가운데, 이런 글도 있었다.
‘CG가 조잡하고,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PPL이 많다고들 얘기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리산 드라마가 좋다. 그렇게라도 산을 볼 수 있어 좋다. 산이란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
산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연예계 속설이 있다. 과연 수준 높고 재미있었음에도 실패한 건가 묻고 싶다. 1% 산악인들의 도전 이야기가 아닌, 천왕봉도 오르지 않고 지리산을 논하는 작가가 아닌, 산꾼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는 드라마가 나오길 기대한다.

본 기사는 월간산 1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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