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풍요로운 김장 파티, 계절의 한 막이 끝났다

신소윤 입력 2021. 12. 3. 11:06 수정 2021. 12. 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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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신소윤 기자의 텃밭 일기]신소윤의 텃밭 일기
수확한 배추·무로 김장
해준 것 없지만 잘 자라
밭 일궈 김치까지 '뿌듯'
배추 농사가 어려웠던 올가을. 살아남은 배추들을 정리하고 있다. 신소윤 기자

밭에 들어서자 들큼한 배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11월13일, 대망의 배추 수확의 날이었다. 드디어 한해 농사를 마치고, 뙤약볕과 벌레와 잡초에게 잠시 안녕을 고하는 날. 땅을 향해 허리를 숙인 사람들의 모습이 어쩐지 여느 때보다 더 분주해 보였다. 방학을 앞두고 종업식을 치르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뿌듯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밭을 향했다.

텃밭 주인은 10월 중순께 “지금부터 김장 배추와 무는 날짜가 아니라 온도가 중요하다”고 알려왔다. “무와 알타리는 일기 예보상 기온이 0도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수확하고, 배추와 갓은 온도가 영하 3도 밑으로 내려가면 밤에라도 와서 수확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독 오락가락했던 올가을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워 얼른 밭으로 달려갔다.

24포기 심었던 배추는 딱 반타작이었다. 중간에 좀 더 솎아 우거지를 삶아 먹을 걸 그랬나 보다. 아까워서 솎아내지 않은 몇몇은 그늘에서 아주 물러버렸다. 그리고 또 여러 포기는 벌레들이 배추 뿌리 뽑아 먹을 기세로 한바탕 잔치를 벌여놓았다. 잘 뜬 레이스처럼 촘촘하게 잎을 갉아먹는 것을 넘어 달달한 속까지 알뜰살뜰 파고든 모양을 보니 한숨보다는 헛웃음이 나왔다.

올해는 유독 배추가 어려운 해였다고 한다. 유례없이 가을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높아 배추가 무르고 주저앉는 현상이 밭 곳곳에서 속출했다. 축축 쓰러진 배추, 선 채로 하얗게 죽어버린 다른 밭 배추들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탐스럽게 자란 무. 신소윤 기자

다행히 무는 어느 밭이나 잘되어 보였다. 우리 밭 무도 반질반질한 얼굴을 땅에서 쏙 내밀고 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오동통하게 매끈한 무부터 인삼처럼 뿌리를 꼬고 있는 것까지 모습도 얼마나 다양한지,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자란 모양이 귀엽고 기특했다. 갓이며 알타리도 배추에 비해 아주 잘 자랐다.

김장용 채소 외에 다른 수확물도 꽤나 풍성했다. 보라색 콜라비는 옹골차게 속을 채웠고, 우산처럼 크게 자란 케일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자란 것 자체가 뿌듯했다. 봄에 실패했던 셀러리는 특히 너무 예쁘게 자랐다. 봄에는 어른 손바닥 길이만큼 자라다 말았는데, 역시 식물에게도 필요한 시간이 정해져 있나 보다. 우리는 “셀러리는 어디 가져다 팔아도 손색이 없겠다”며 “‘샐러리맨 도시 농부’ 따위 이름 붙여서 어디 마켓에라도 나가보자”며 주접을 떨었다.

봄여름의 밭은 때마다 쉴 틈 없이 먹을 것을 내줬다면, 가을의 밭은 한판 잔치하듯 풍성한 수확물을 한꺼번에 내줬다. 두둑이 챙겨뒀으니 남은 겨울을 이걸로 잘 보내보라는 듯이. 처음 하는 김장이 부담스러웠지만, 우리는 밭이 건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첫 김장을 배추를 직접 심어 절이고 치대는 일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냐만.

거대하게 자란 케일. 신소윤 기자

집으로 가져온 배추를 쫙쫙 가른 뒤 굵은소금을 뿌려 욕조에 차곡차곡 쌓았다. 하룻밤 소금에 재운 배추는 켜켜이 껴 있던 벌레들을 대방출하며 잘 절여졌다. 여러 번 헹궈서 부엌 한쪽에 쌓아두니 뽀얗게 씻긴 배추가 햇살에 빛났다. 그 모양을 보자니 벌레에 기겁했던 순간은 어느새 잊어지고 또 금세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사과, 배를 갈고 마늘과 생강을 찧고, 언젠가 충남 청양 취재를 다녀오며 샀던 귀한 고춧가루도 꺼냈다. 여기에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새우젓, 생새우를 멸치, 다시마, 채소를 넣어 우린 육수에 넣고 섞으니 제법 김치 양념 맛이 났다. 일을 너무 벌였다는 생각과 얼렁뚱땅 밭을 일궈 김장까지 가본다는 벅찬 마음을 오가며 배춧잎 사이에 양념을 채워 넣었다.

총각김치. 신소윤 기자

장장 1박2일의 노동 뒤 드디어 찾아온 김장 파티의 시간. 갓 담근 김치를 길게 쭉쭉 찢어서 갓 한 밥에 척 걸쳐서 한술, 푹 삶은 돼지고기에 걸쳐서 또 한술, 달달한 막걸리로 입가심하고 두 다리를 쭉 뻗으니 계절의 한 막을 잘 끝낸 느낌이다. 김장이란 가을의 햇볕과 바람을 내 집 김장독 안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일이구나. 밭에서부터 시작한 김장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1박2일의 김장 노동 후 꿀맛 같은 밥상. 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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