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과 새로움 사이의 공백, 현 시대는 병들었다..'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문학수 선임기자 2021. 12. 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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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도널드 서순 지음·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384쪽 | 2만원

“낡은 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유명한 말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에게서 나왔다. 1930년 이탈리아 남부의 투리에 자리한 파시스트 감옥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그람시는 이렇게 썼다.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옥중수고>)

그람시가 말한 위기란 “권위의 위기”다. 이 책의 저자인 도널드 서순(75)이 재인용한 바에 따르면 “지배 계급들이 기반을 잃고, 그들의 지배를 떠받쳐온 합의가 시들해지며, 대중에 대한 그들의 장악력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람시가 보기에 당시의 대중은 냉소와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엘리트 집단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엘리트들도 그 사실을 익히 알았다. 하지만 낡은 상황을 대체할 ‘새로운 것’은 요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낙관하기 마련이지만 그람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당시의 상황은 “잠재적 혁명 상황”이 아니라 “병적 징후로 가득한 공백기”였다.

당시의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으로 상징되는 좌절을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은 실패했고 좌파는 재기불능에 빠졌다. 한쪽에서는 파시즘이, 다른 한쪽에서는 극좌 모험주의가 맹동했다. 이어지는 서순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러시아혁명이 일으킨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기대했던 유럽 대륙 차원의 혁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10월혁명 직후에 몽골 한 나라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업적을 따라 하려고 했던 (유럽의) 혁명가들은 철저히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이 도래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프랑코가 지배했던 스페인만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그리스, 폴란드, 리투아니아, 유고슬라비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헝가리도 오십보백보의 상황이었다. 유럽 전체가 파시즘에 물들고 있었다. 그것은 “병적 징후”였다.

저자 도널드 서순.



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 화두 얻어
자본주의 좌절에 대한 뼈아픈 성찰

기성정당의 몰락·포퓰리즘 난립
에르도안·두테르테·보우소나루 등
곳곳서 위험한 통치자들의 득세
불평등·혐오가 바로 ‘병적 징후’들

감옥의 그람시가 써내려간 32권의 노트(2800여쪽)는 한마디로 말해 “패배에 대한 고찰”이다. 뼈아픈 통찰의 과정에서 앞서의 언급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 서순은 바로 그 통찰을 화두로 삼았다. 그는 “1930년대와는 다르겠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복지와 일자리, 꾸준한 성장을 약속했던 자본주의가 또 한번 좌절을 맞으면서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그는 “유럽을 통치해온 기성 정당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다”면서 “사민주의 좌파뿐 아니라 보수당도 기반을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특히 동유럽에서 “권위주의 통치자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됐다는 사실을 우려한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병적 징후들”이 가득하다. 저자는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호명한다. 인도의 모디, 터키의 에르도안, 투르크메니스탄의 베르디무함메도프가 도마에 오른다. 베르디무함메도프는 2017년 선거에서 98%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다. 브라질에는 “동성애 혐오자,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자, 고문 옹호자인 보우소나루”가 있다. 남아공에는 “노동조합 지도자 출신의 백만장자 라마포사”가, 필리핀에는 “위험한 정신병자 두테르테”가 있다.

서순은 “위기에 빠진 21세기”의 병적 징후 가운데 하나로 “외국인 혐오”를 거론한다. 그는 “오늘날의 무슬림 혐오는 (과거의) 반유대주의와 달리 돈벌이”가 될 뿐 아니라 정당과 정치인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언론들이 “외국인과 난민을 둘러싼 히스테리”를 부추기고 정치인들이 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수당과 노동당을 막론하고 “난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은” 영국의 정치인들을 힐난하며, 프랑스의 중도파 마크롱과 사회당의 올랑드도 도마에 올린다. 오로지 독일의 메르켈만이 영국과 프랑스, 헝가리 등과 달리, “난민 반대 히스테리에 반기를 들었다”고 호평한다. 미국에서는 “도날드 트럼프가 등장하기 이전인 2015년에 이미, 무슬림과 아랍인을 겨냥한 혐오 범죄가 2000년대 들어 최고조에 달했다”는 설명도 내놓는다.

물론 외국인 혐오는 병적 징후의 일각일 뿐이다. 저자는 “사라져가는 낡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새로운 것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는가?”라 자문하고, “사라져가는 낡은 것은 1945년 이후 30년간 서구를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답한다. 그 핵심에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진행됐던 복지 확대, 맞춤형 보호가 이뤄진 복지사회주의”가 있다. “완전고용”이 이뤄지면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영광의 30년”이 종말을 맞았다고 진단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불평등이 심화되고 급기야 200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복지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는 ‘낡은 것’이 됐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사회의 위기가 정치의 위기로 바뀌고 있다”면서 “기성 정당이 몰락하고 포퓰리즘이 판치는”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병적 징후라고 진단한다. “현대 정치는 실패로 치닫고 있다”고 단언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 ‘잃어버린 희망?’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애매한 제목이 저자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여든을 바라보는 ‘수다쟁이 역사학자’는 “시대가 병들었어도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을 잠시 거론하지만 그다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책의 표지에 수록한 한 편의 그림이 저자의 심경을 대변한다. 영국의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가 그린 ‘희망(Hope)’(1886)이다. 그림 속 여성은 허름한 옷을 입고 눈을 가렸다. 현이 다 끊어져 한 줄만 남은 리라를 들었다.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역사학자 서순은 현재 영국 런던대학교 퀸메리 칼리지의 명예교수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정보와 독특한 입담으로, <사회주의 100년> <유럽문화사> 등 대작들을 썼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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