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1화) [연재소설]

에린 2021. 12. 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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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영지는 약속시간이 20분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을 마친 세라는 편의점 조끼를 벗고 핸드폰을 챙겨 스낵코너에 앉았다. 영지를 기다리는 동안 구인광고 사이트를 검색했다. 새로운 채용공고가 있는지 유심히 들여다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야구모자를 꾹 눌러 쓴 여자가 들어와 세라 옆에 털썩 앉았다. 여자가 마스크를 벗고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세라야, 나야.”

세라는 깜짝 놀라 영지의 모자를 벗겼다. 영지의 코는 거즈를 댄 채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고 두 눈의 안쪽은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쌍꺼풀 라인에는 군데군데 실밥이 보였다.

“사촌 언니 상담하는 데 따라갔다가 갑자기 하게 됐어.”

“아파 보여….”

“아직은 얼얼한데, 이러다 괜찮아진대.”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본격적인 취업전쟁이 벌어졌다. 성적에서 분별력이 없어지자 학생들은 외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성형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나면서 수술에 대한 거부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영지는 외모가 곧 스펙이라고 믿었다. 밀폐된 도서관의 건조한 공기는 피부의 적이라며 매번 카페에서 공부하자고 세라를 졸랐다. 이런 영지의 외모에 대한 믿음은 증명된 셈이었다. 병원에서는 취업준비생 패키지라는 이벤트를 걸어 광고했고, 학생들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세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형은커녕 자신만 취업준비생의 기본요건에서 멀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술 자국으로 난감해하던 영지의 얼굴은 한 달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말끔해졌다. 전보다 눈매가 또렷해졌고 오뚝해진 콧날은 커리어우먼처럼 당차 보였다. 외모가 스펙이라는 영지의 말이 진실이었을까. 영지는 입사 시험 두 번 만에 중견기업의 비서실에 합격했다. 영지보다 학과성적이 좋던 세라는 면접에서 연달아 떨어졌다.

영지가 첫 월급을 받던 날, 편의점으로 선물을 가져왔다. 세라에게 하이힐을 꺼내 신어 보라고 닦달했다.

“키가 8센티 커진다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겠어?”

세라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하이힐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발을 넣었다. 갑자기 과자 진열대 꼭대기가 손이 닿아 기분이 묘했다. 몇 걸음 앞으로 나가자 균형을 잃고 몸이 휘청거렸다. 영지는 턱을 손으로 감싸며 세라를 뒤에서 지켜봤다.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지는 취직에 성공하려면 세라의 작은 키를 하이힐로 극복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세라는 처음에 손사래를 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이힐에 눈길이 갔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힐을 신고 가게 안을 돌아다녔다. 화장실을 갈 때도 용기를 내서 하이힐을 신고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화장실 앞에서 꽃집 여자와 마주쳤다. 세라는 여자가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깨를 뒤로 쫙 펴고 허리를 세우고 의식하며 걸었다. 편의점으로 돌아와 손님이 가져온 햄샌드위치의 바코드를 찍으며, 꽃집 여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뒤돌아보던 여자의 눈빛 때문인지 어쩌면 세상도 자신을 달리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첫 면접에서 떨어지고 자존감이 가을 낙엽처럼 바닥을 뒹굴 때였다. 처음 응시한 회사는 디지털 플랫폼기업인 P정보통신 회사였다. 필기시험과 2차 면접시험까지 순항했다. 최종면접 명단에 올랐을 때 무척 긴장했지만, 면접관들의 긍정적인 질문에 마음이 한껏 고무됐다.

“해외 발령도 상관없겠어요?”

“네! 해외 근무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라는 이미 해외 발령을 받고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가 혼자 지낼 걸 생각하니 걱정부터 됐다. 해외 발령이 나면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내일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 다가왔다. 세라는 수업이 없는 날이라 여유 있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문자가 들어올 때마다 숨을 죽이고 확인했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 ‘그린마트 폭탄 세일’이라는 스팸 문자가 눈치 없게 들어왔다. 가격표를 붙여야 하는 새 상품이 진열대에 쌓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금세 해치웠을 일들이 더디게 손이 갔다. 계산할 때도 화장실에 잠시 다녀올 때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문자를 읽어 내려가던 세라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세라는 눈을 비비며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환호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거렸다. 바닥을 구르는 힐 굽 소리에 음료 코너에 있던 손님이 세라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P정보통신 회사가 생애 첫 회사라니, 세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세라는 면접 날 입었던 정장을 꺼내입고 소집 장소로 출발했다. 비바람이 치는 궂은날인데도 불평 한 번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설레어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우산 손잡이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바람에 휘둘리지 않게 힘주어 걸었다. 하이힐 안쪽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교통편도 편리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만 가면 바로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세라는 옷매무새를 살피고 하차 벨을 눌렀다. 순간,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지금은 버스에서 내리는 게 중요했다. 우산살이 바람에 맥없이 휘둘렸고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한 손으로 우산을 꽉 붙들고 다른 손으로 치맛단이 휘날리지 않게 부여잡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단정한 정장 차림의 젊은 직원들이 하나둘 빌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층 빌딩의 위엄은 비가 오는 날에도 여전했다.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결지인 20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여자가 세라가 20층을 누르자 가벼운 눈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도 합격자인가. 세라는 벌써 동지애가 발동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배치된 디지털 화면에는 회사홍보 영상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스크린 속 홍보 직원을 보니 지난날 학교, 도서관, 편의점으로 분주하게 오가던 자신이 생각나 울컥했다.

‘유세라! 이제 너도 저렇게 되는 날이 올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면에 신입사원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와 하단에는 안내 화살표가 보였다. 세라는 대회의실이라고 쓰인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문자 알림이 계속 울렸다. 그제야 버스에서 수신된 문자가 생각났다. 문자를 찾아 들어갔다. 세라는 문자를 읽어내려가면서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다. 다시 한번 문자를 확인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세라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하였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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