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사기꾼들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와서 보고 결정하시라" [다른 삶]

이숙명 입력 2021. 12. 3. 16:06 수정 2021. 12. 3.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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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명의 '유유자적'

[경향신문]

발리에서는 작년에 록다운이 벌어지고 비자 규정이 수시로 변경되는 바람에 낭패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그들을 상대로 에이전시 사기도 기승을 부렸다. 그중 누군가 큰 벌금을 물게 되었다며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상담 글을 올렸다. 그 답글 중에 발리 생활이 다하는 날까지 내겐 잊히지 않을 명언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공문서는 당연히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한다. 외국인은 무엇을 하든 대리인이 필수일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 이민 생활의 시작도 당연히 각종 에이전시와의 접촉이다. 믿을 만한 에이전트를 찾는 일도 알음알음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Find somebody who knows somebody(누군가를 아는 누군가를 찾으시오).’

이런 얘기를 공식 미디어에서 찾아보긴 어렵다. 하지만 발리 생활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누구나 알게 되는 현실이다. 누군가를 아는 누군가, 우리는 그들을 ‘에이전트’라 부른다.

작년에 벌어진 비자 사기는 주로 이런 패턴이다. 일명 ‘불레 트랩’(피부가 흰 사람을 뜻하는 인도네시아어 ‘불레’와 덫이라는 뜻의 영어 ‘트랩’을 합한 ‘외국인 잡이 덫’이라는 의미)이라고도 불리는 사기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렴하게 비자를 갱신해준다는 광고를 낸다. ‘코로나 가격’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모든 것이 할인 중이었으니, 그 역시 일거리가 줄어든 에이전트의 가격 전략이라 생각한 외국인들이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사기꾼은 착수금과 여권을 받아간 후 진행 중이라는 응답만 반복하면서 시간을 끈다. 그사이 비자가 만료된다. 여권을 맡긴 사람은 슬슬 불안해지지만 ‘여기선 며칠 차이 정도는 에이전트들이 어떻게 해결하더라’는 소문과 경험칙을 믿고 기다린다. 그사이 하루 30달러씩 무비자 체류 벌금이 차곡차곡 쌓인다. 늦게라도 여권을 돌려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끝까지 만남을 회피한 악질들도 있다. 털면 어디서든 먼지가 나게 마련인 외국인 신분으로 경찰에 달려가기도 꺼림칙하다. 경찰의 도움으로 피해자를 잡는다 해도 이민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비자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에이전트에 의존해야 하는 외국인
SNS서 “매우 저렴” 유혹에 빠져
비자 갱신 맡겼다가 불법체류 신세
결국 다른 에이전트가 나서 수습
누군가를 통해 ‘돈을 쓰면’ 되는 곳
단골 프리미엄 없는 특이한 문화
요금은 더 비싸고 서비스도 소홀
이곳에 정착하려는 한국 지인들
이괜찮은 곳 소개 부탁해오면 난감

그 일은 내 주변에서도 벌어졌다. 그는 500만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 위기에 처했다. 사정을 토로하자 친구들은 “그러게 너무 싼 건 진짜일 수가 없다니까!” “어떻게 그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뒀냐”라고 피해자 탓부터 했다. “구글 지도에서 후기를 보니까 스미냑 감옥이 지낼 만하다더라(당연한 말이지만 발리에도 감옥이 있다!). 몸으로 때우지 그래?”라고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제야 알아본 다른 에이전시들은 수습하기 늦었다며 수임을 거부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던 막연한 낙관이 사라졌다. 그는 원래 이용하던 에이전시가 있었는데 사기꾼의 저렴한 호가에 갈아탈 결심을 한 터였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망설였지만 주변에서마저 이렇게 나오자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원래 이용하던 에이전시에 연락했다. 그 회사는 이런 연락을 많이 받았던지 지체 없이 준비된 답변을 보내왔다. ‘해결 가능. 비용 얼마.’ 정상적인 비자 연장 비용보다는 비싸지만 벌금보다는 훨씬 싼 가격이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아는 누군가를 통해’ 사태는 수습되었다.

당연히 이 이야기의 모두가 잘못했다. 제때 비자를 챙기지 않은 사람, 사기꾼 장막 아래서 사태를 해결한 에이전트와 아마도 이민국에서 일하는 누군가, 모두 불법을 저질렀다. 동시에 한 외국인의 돈으로 사기꾼, 에이전트, ‘누군가’가 모두 이득을 보았다. 그 외국인마저 종국에는 생활의 터전을 잃지 않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아졌고, 발리는 역시 살 만한 곳이라고 느꼈다. 이러니 불법이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유럽의 관료주의를 성토하는 이민자들을 보다가 “여기나 거기나 시스템은 답답하지만 여기는 돈을 쓰면 해결된다는 게 차이가 아닐까? 그 유연성에 적응된 채 유럽을 보니까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거고”라고 하자 그들이 웃으며 수긍했다. 물론 생일날 폭죽 대신 우주선을 쏘아 올릴 정도로 돈이 많으면 유연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발리의 운전면허시험장. 한 번 떨어지면 일정 기간 재응시가 불가능하고 응시료도 들기 때문에 현지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암암리에 브로커를 통해 면허를 거래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외국인들의 거의 모든 활동이 에이전트에 의존해 돌아간다. 심지어 운전면허증 발급을 돕는 대리인도 있다. 이건 대놓고 불법이니 한글로 적을 때 부정적 어감이 가미되는 ‘브로커’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발리는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스쿠터 운전을 안 하면 생활이 안 된다. 그래서 로컬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부모에게 운전을 배우고 스쿠터로 등·하교를 한다. 그게 익숙하다 보니 로컬들은 무면허로 영업용 차량을 몰기도 한다. 여행자들이 발리에서 접촉사고가 났는데 자국처럼 보험사와 경찰에 연락하려니까 상대방이 줄행랑을 치더라는 경험담은 흔하다.

일단 자가 운송수단의 필요성에 비해 면허 취득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영어 서비스가 없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상식 시험에서 줄줄이 탈락이다. 그걸 통과해도 난관이 남는다. 어느 로컬 친구는 실기에서 세 번 떨어졌다.

“오르막에서 1㎝ 미끄러졌다고 탈락하기도 했으니까. 세 번째 떨어질 때 감독관이 그만하면 됐으니까 그냥 돈으로 해결하라 하더라고.”

그러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외국인이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무면허 스쿠터 운전 한 번 안 해본 외국인은 찾기 힘드니까. 간단한 원동기 면허에 될 때까지 도전하든가, 다른 아세안 국가에서 면허를 따와서 교환하는 방법도 있지만 에이전트들은 그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시험 없이 면허증을 만들어준다고 안내한다. 인도네시아 면허를 한국 면허로 교환할 수 있는 제도를 악용해 그렇게 시험 없이 산 면허를 한국까지 가져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는 그 경우 불법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를 게재하고 있다.

때로는 ‘누군가를 아는 누군가’를 잘 활용하는 게 동남아 생활의 비법인 양 믿다가 낭패를 겪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외국인 개인이 부동산을 영구소유하는 건 ‘누군가’를 알아봤자 안 되는 일이다. 편법으로 그게 가능한 듯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사기꾼이다.

앞서의 비자 사기 같은 일은 법무사, 세무사 등 각종 ‘사’자 붙은 대리인을 구할 때도 빈번히 벌어진다.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저렴하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사기꾼들이 일을 망쳐놓고 시일이 촉박해 구한 마법의 에이전트가 사태를 수습한다! 발리 생활의 패턴이다.

인도네시아 이민 생활의 시작도 당연히 각종 에이전시와의 접촉이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산 사람들은 선뜻 누군가를 추천하지 않는다. 시장 좌판이건 법률회사건 반복 이용할수록 요금도 올라가고 서비스도 소홀해지는 게 인도네시아 문화의 특이한 점이다. 단골 혜택이 아니라 단골 핸디캡이 있는 것이다.

몇 번 그걸 겪고 나면 에이전시들과 친해지거나 일을 따주는 걸 주저하게 된다. 결국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일은 알음알음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나도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발리에서 사업을 하거나 부동산을 구하고 싶다며 에이전시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간혹 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가 어렵다. 최근에도 그런 부탁을 받았기에 이렇게 긴 설명을 쓰는 것이다. 올해 온가족이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간 지인은 호텔 마중부터 부동산 임차, 차량 대여까지 한국에서 에이전시를 통해 다 예약하고 가던데 발리에선 일이 그렇게 간편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외국에서 인터넷으로 미리 뭔가를 준비하려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현지에서 직접 부딪치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SNS 광고나 뜬소문이 아니라 믿을 만한 이용자들의 정보를 구하고,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사기꾼인지 마법의 에이전트인지 감별할 기본 상식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열심히 찾으면 반드시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게 발리 생활의 기쁨이기도 해서 결국 내 대답은 ‘일단 와보시라’가 되고 만다. 이곳에선 순순히 가능한 것도 영 불가능한 것도 없으니까.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이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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