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장수비결 "일할 땐 청년, 안하면 환자..하루 10시간 작업"
31일까지 김종영미술관 전시
"일할 때가 참 기쁘고 좋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가면 눈에 띄는 석상이 있다.
둥근 얼굴에 길고 가늘게 뜬 눈, 작은 입술. 화려한 치장 대신 무늬 없는 긴 옷을 입었다.
기존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마치 언뜻 보면 성모상 같아 보이는 '관음상'(2000)은 모두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원로조각가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으로, 동년배인 법정 스님과 교우하며 제작하게 됐다. 그의 전시 '구순(九旬)을 사는 이야기'가 열리고 있는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만난 최 교수는 "법정이 아니었음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내 전시회 방명록에 썼더라. 이후 그걸 오래 생각했다"며 "'관음상'도 남자였으면 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상 중 몇 개만 남자를 대상으로 했고 나머지는 모두 여성상이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
둥근 얼굴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빨간 치마에 초록색 웃옷, 강렬한 오방색을 입은 여인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을 지낸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명동성당의 '예수성심상'(1987) 등을 제작했다. 종교의 벽을 넘어 다양한 종교 조각도 제작했다. 특히 반가사유상 등 한국 불교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가리키며 "저것들에 '종교성'이 깃들어 있다"며 "반가사유상의 맑고 깨끗함, 영원한 평화가 내가 갈 길이라고 여기며 걸어왔고 지금도 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수줍고 다소 위축돼 보였던 그는 자신의 작품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 시간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민주화 운동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억은 또렷했다.
"중학생 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상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음에도 해방 때까지 그걸 인식하지 못했다. 6·25전쟁으로 삼천리가 박살났던 것도 잊을 수 없다. 4·19혁명 때 전 국민이 나서 불의에 항거했다. 삶이란 것은 예술과 떼어놓을 수 없다. 예술은 인간, 인생, 나의 인생이야기다."
"어두운 시절을 살아선지 어두운 것을 벗어나려 굉장히 노력했다. 요즘은 밝아졌는데, 마치 긴 깜깜한 터널을 지나 바깥으로 나온 것 같다. 80년대엔 매일 데모에 최루가스 터지고 그렇게 살았다."
최 교수는 평생 존경했던 스승인 김종영과 장욱진을 벗어나는데 20년이 더 걸렸다고 했다. 서양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와 알베르토 자코메티도 사숙한 스승들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스승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더니 그분들이 해 놓은 것을 이해하니까 자유롭게 되더라. 역사라는 것도 도망간다고 해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이해해야 벗어나진다."
그는 쉰 살 때 특별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눈 뜨기 직전, "조각은 모르는 것이다"라는, 천둥처럼 큰 소리가 머리로 들렸다는 것. 그는 "아름다움도 모르는 것"이라며 스승인 김종영도 그 얘길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최 교수는 미술대회 부상으로, 1971년 약 100일간 일본,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과 이집트 등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미켈란젤로, 비너스 등을 봐도 감격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기둥만 남은 아크로폴리스 신전에서 가슴으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예술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며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듯이 예술도 정답이 없다.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번 초대전 출품작은 목조·브론즈 조각 42점, 드로잉 30점, 판화 5점 등 77점이다. 최근 제작한 작품도 15점에 달한다.
우리 나이로 올해 구순이지만 최 교수는 그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모자를 벗자 풍성한 은발이 쏟아져 내렸다. 건강 비결을 묻자 따로 하는 운동도 없다고 했다. 요즘도 작업을 시작하면 꼬박 하루 10시간씩 집중한다는 그는 "일을 할 때는 청년이고 안 할 때는 환자"라면서 웃으며 말했다.
"새벽에 일찍 잠이 깨면 어제 하던 작업이 생각나 참지 못하고 작업실로 간다. 그렇게 작업하는 것이 즐겁다. 일할 때 즐거움이라고 할까, 기쁨이라고 할까 그렇다."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53년 '문학세계'에서 김종영의 작품을 보고 감동해 조각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54년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해 김종영의 가르침을 받았고, 졸업 후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김종영미술관장도 맡았다. 국민훈장 동백상과 문화훈장 은관과 ,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cinspai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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