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문 두드리거나 벨 누르지 말아 주세요"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입력 2021. 12. 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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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적 손해배상⑤] 다이너마이트 배달책 오동찬씨
"문 두드리면 누군가 죽이러 온 것만 같아..술로 연명"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3일 오후 광주 북구 용봉동 한 다세대 주택에서 만난 오동찬씨(67). 오씨는 1980년 5월 당시 전남 화순에서 광주로 다이너마이트를 옮겼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2021.12.4/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혹시라도 저희 집 앞에 오시면 절대로 문 두드리거나 벨 누르지 말고 근처에서 먼저 전화주세요.'

3일 오후 북구 용봉동 한 다세대 주택 앞. 인터뷰 전 그에게 받은 문자를 떠올리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전화 연결음이 울린 후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기자임을 알리고 1층 그의 집 현관문으로 향했다. 퀭한 모습의 오동찬씨(67)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집 현관문에도 '제발 문 두드리거나 벨 누르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오씨의 방안은 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낮술을 마셨는지 불콰한 얼굴에 양쪽 눈 밑엔 진한 다크서클이 내려 앉아있었다.

"집에 누군가를 들이는 데에도 큰마음을 먹어야 해요."

그때 맞은 편 집에 택배가 왔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동찬씨는 흠칫 놀라며 가쁜 숨을 내쉬더니 벌떡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수십 개의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 대신 소주 반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죄송해요, 누가 집 앞에 찾아오기만 해도, 걸어가는 소리만 나도 무서워서요. 약이랑, 술 한 잔만 마실게요."

오씨의 삶이 한순간에 뒤바뀐 건 41년 전 그날이다.

80년 5월21일,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스물일곱의 동찬씨는 송광사 나들이를 다녀온 후 그날 오후 전남 화순 시내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지프차를 탄 시민 몇몇이 동찬씨 일행을 보며 큰소리를 질렀다.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 술판 벌일 때냐!"

시민들은 광주에서 군인들이 총을 쏴 시민들을 죽였다고 했다.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술 마시던 동찬씨와 친구들은 궁금증과 호기심, 걱정과 불안 등 수많은 생각에 휩싸이면서도 지프차를 탄 시민들을 따라나섰다.

"술김이었죠.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젊은 마음에 지역을 지키겠다고 따라간 거죠."

동찬씨 일행은 지프차를 타고 화순경찰서와 능주파출소 무기고에서 총과 실탄을 챙겼다. 이미 경찰들은 전부 도망가고 파출소 안은 텅 비어있었다.

밤이 되자 화순 능주에는 시민군들이 탄 지프차가 수없이 몰렸다. 그 중 지프차 한 대에 타고 있던 시민군들이 탄피 한 보따리와 커다란 박스를 건넸다. 화순 탄광에서 가져온 다이너마이트 박스였다.

한 시민군이 "다이너마이트를 나눠서 광주로 옮기자'고 했고, 동찬씨를 비롯한 13명이 다이너마이트를 차에 나눠 실었다.

22일 새벽, 동찬씨 일행은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차를 몰고 1시간여를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는 난리 통이었죠. 길가에는 피가 낭자했고 어디선가 '탕, 탕, 탕' 총소리가 나기도 했어요. 술도 마셨고, 지역 방어하자는 마음으로 가긴 했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무섭기만 하더라고요."

덜컥 겁이 난 동찬씨 일행은 광주 동구 학동 다리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다른 시민군들에게 건네주고 곧장 다시 화순으로 돌아왔다.

화순에 도착한 뒤 동찬씨와 친구들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시민군에 합류해 함께 싸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커 뿔뿔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갖고 갔던 총기 6자루는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한 선배가 일하던 중국집에 숨겼다.

그렇게 동찬씨는 광주에서 본 모든 것을 잊고 일상에 복귀했다.

'쾅, 쾅, 쾅!'

1980년 6월30일.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찬씨 집에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렸다. 평범한 차림의 남성 셋이 동찬씨를 찾았다.

"실례합니다, 말 좀 물을게요. 혹시 김XX씨를 아세요?"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광주에 다녀온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찬씨는 5·18과의 연관성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를 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제야 남성들은 자신들이 경찰임을 밝히고 잠시 경찰서에 다녀오자며 동찬씨를 차에 태웠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화순경찰서. 서에 도착하자 경찰들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유치장에 동찬씨를 넣은 뒤 몸 곳곳을 몽둥이로 폭행했다. "야 이 XX들아, 간첩 놈들! 총 들고 니들 어디 다녔어?" 잠시 뒤 함께 광주에 다녀왔던 친구들과 선배도 하나둘 잡혀 오기 시작했다.

선배가 중국집에 숨겨둔 총기를 반납한 이후에도 폭행은 계속됐고 그 후 1개월 동안 구속됐다. 7월 말쯤, 상무대 영창으로 이감됐을 때는 군인과 경찰로부터 주먹에 맞아 눈가가 찢어지기도 했다.

동찬씨는 군 법정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후 대법원 최종심에서 6년으로 감형돼 수감 중에 1981년 4월3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10개월여 만에 고향 집은 전부 망가져 있었다. 천장은 주저앉았고 물이 샜다. 벽면은 기울어져 폐허처럼 변해있었다.

"어머니께 이야길 듣고 깜짝 놀랐죠. 제가 경찰에 잡혀간 이후로 군인들이 와서 총기를 찾는다고 천장을 다 뚫고 벽을 다 깼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어머니와 10살도 안 된 동생들이 나무로 막아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후로 동찬씨의 삶은 지옥이 됐다. 출소 후 경찰들의 통제와 감시는 계속됐고 고문 후유증으로 어깨를 펴지 못해 통증을 안고 살았다. 육체적 고통보다 끔찍한 건 트라우마였다.

누군가 집 문 앞을 지나기만 해도 흠칫 놀라 솜털이 곤두섰다.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꿈에선 매일 경찰이 찾아왔다. 계속되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잊기 위해 동찬씨는 술을 찾기 시작했다.

"80년 이후 술을 조금씩 먹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수면제와 술을 함께 먹었어요. 죽으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정말 잠을 푹 자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께 효도하고픈 마음에 결혼을 하려 했지만 '폭도'라는 시선 때문에 국내 여성과는 결혼할 수 없었다. 1996년에 중국 국적의 아내를 얻었지만 계속되는 알코올 의존으로 아내는 동찬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5~6년간 입원 치료를 하는 사이 당뇨로 투병하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 역시 당뇨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떴다.

퇴원 후 아들과 아내는 동찬씨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후 아내의 요구로 이혼을 하게 돼 재판에 갔지만 조정에서 동찬씨의 알코올 중독 병력 때문에 양육권도 빼앗겼다.

전문하사로 입대한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집에 걸어놨지만, 가끔가다가 아들의 사진을 보고도 5월 그때가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오동찬씨 집에 걸려있는 대통령 명의의 민주유공자 증서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진. 그 옆에는 오씨의 가장 큰 보물이라는 아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2021.12.4/뉴스1

동찬씨는 과거 국가로부터 받은 대통령 명의의 민주유공자 증서와 아들이 삶의 이유라고 했다.

당시 3800만원의 보상금도 함께 받았지만 아내에게 이혼 위자료로 지급한 이후 동찬씨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불도 안 켜고 살아서 전기세도 안 나오고… 술값 정도는 제가 일용직으로 벌 수 있으니까요."

1980년 그날, 동찬씨와 함께 광주로 다이너마이트를 옮겼던 일행 13명 중 6명은 이미 알코올 중독과 자살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예전에는 같이 다이너마이트 옮겼던 친구들이 죽었다고 하면 슬펐죠, 이젠 안 슬퍼요. 어차피 나도 곧 죽을 테니… 이렇게 소주 마시다가 죽으면 누가 시체라도 거둬주겠죠. 정신적 손해배상 나오면 우리 아들, 뭐라도 남겨줄 수 있지 않을까요."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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