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없어 곧 결정한다"던 CPTPP 가입..농촌 표심 걱정에, 다음 정부로 미루는 文정부

세종=전준범 기자 2021. 12. 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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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CPTPP 가입 여부 11월 초에는 결정" 외쳤지만
이후 쥐 죽은 듯 고요.."당분간 관련 논의 계획 없어"
대선 전 250만 농업인 표심 관리한다는 시각 많아
11월 3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국민과 함께 하는 농민의 길과 전국민중행동이 공동 주최한 CPTPP 가입 논의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협정(RCEP)’ 늑장 비준으로 화를 자초한 정부가 또 다른 초대형 FTA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머뭇거리고 있다. 불과 두 달 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제 시간이 없다. 결정이 막바지에 와 있다”고 할 때만 해도 한국이 곧 CPTPP 합류를 확정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정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CPTPP 관련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정부 안팎에선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문재인 정권이 시장 개방 속도를 조절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대외 개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농·수·축산업계의 표심을 신경 쓰느라 CPTPP 논의를 일부러 수면 아래로 내렸다는 관측이다. 우리가 뜸 들이는 사이 중국·일본 등 이웃 나라는 통상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CPTPP는 미국을 제외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국가가 참여한 초대형 경제 협력체다. / AP연합

◇ 11월 초 결정한다더니…쏙 들어간 CPTPP 논의

5일 정치권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당분간 CPTPP 관련 현안을 회의 안건에 올릴 계획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올해는 확실히 (CPTPP 안건을) 다루지 않을 듯하고, 내년에도 대선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산업부 관계자도 “당장 잡힌 CPTPP 관련 회의는 없다”고 했다.

두 달 전까지 정부는 CPTPP 가입 결정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행동했다. 홍남기 부총리는 10월 14일(현지시각)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에 방문했다가 기자들을 만나 “CPTPP 가입 시 국내 제도 개선이 불가피한 데, 지난 2년 동안 부처 간 검토를 거쳐 개선 작업을 해왔다”며 “이제 시간이 없다. ‘가입한다, 안 한다, 하면 언제 한다’까지 포함한 결정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내야 한다. 결정의 막바지에 와 있다”고 했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도 10월 21일 미국·싱가포르·호주·영국 등 CPTPP 주요 회원국·관련국 통상 전문가들과 화상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역내 통상 질서의 변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CPTPP는 전략적 가치가 크다”고 했다. 같은 날 정의용 외교부 장관 역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CPTPP에 가입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잇따라 CPTPP 가입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여론에 불을 지핀 건 앞선 9월 중국과 대만이 CPTPP 가입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초 발표한 ‘바이든 시대 국제 통상 환경과 한국의 대응 전략’ 보고서에서 “한국이 최소한 중국보다는 먼저 CPTPP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다. KDI에 따르면 CPTPP에는 시장 개방과 정책 투명성과 관련해 중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항이 많다. 중국의 가입 협상이 시작되면 그 협상은 장기간 정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국보다 먼저 가입해야 한다는 게 KDI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CPTPP 가입 여부를 논의한다던 대외경제장관회의를 두 번이나 미루더니 11월부터는 아예 ‘CPTPP’라는 용어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통상 분야의 한 민간 전문가는 “CPTPP 합류를 당장이라도 결정할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입에 올리더니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며 “이번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통상 문제에 관해서는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12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원들이 RCEP 국회 비준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 “대선 앞두고 농업계 표심 자극할 필요 있나”

일각에서는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당과 정부가 CPTPP 가입 속도를 조절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CPTPP 의장국은 일본이다. 한국이 CPTPP 가입 의사를 전할 경우 일본은 가입 조건으로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제한을 풀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로선 협정 가입을 위해선 이런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다. CPTPP는 모든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가입국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빗장을 풀자니 어민들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후쿠시마 수산물 이슈는 어업 종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도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굳이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CPTPP 가입을 강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정부 안팎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한 여당 관계자는 “민감한 현안은 대선 이후로 밀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게다가 내년 2월부터는 세계 최대 규모의 FTA인 RCEP이 발효된다. 정부 입장에서는 CPTPP와 별개로 이미 RCEP 발효로 농업계 심기를 건드린 상태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RCEP 비준 동의안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를 통과한 이달 1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250만 농업인을 무시하고 RCEP 국회 비준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비준 처리를 강행할 시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14만 회원은 더 이상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신뢰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최범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CPTPP와 관련해서도 “RCEP 국회 비준으로 농촌 현장의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정부가 CPTPP 가입마저 선언한다면 이를 농업 포기, 나아가 먹거리 주권 포기로 간주하고 대정부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부산 남구 신선대·감만부두에 수출입 화물이 쌓여 있다. / 연합뉴스

◇ 굼뜬 韓과 달리 부지런히 FTA 영토 확장하는 경쟁국들

문제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표류하는 사이 중국·일본 등 주변 경쟁국들은 글로벌 통상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실리를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CPTPP는 일본·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국가가 참여한 초대형 FTA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 블록을 지향했던 TPP에서 탈퇴하자 2018년 일본을 중심으로 나머지 11개 국가가 출범시킨 경제 협력체다. CPTPP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치면 전 세계의 13%, 무역 규모를 합치면 15%에 이른다.

한국보다 먼저 가입 의사를 밝힌 중국과 대만이 실제로도 한국에 앞서 CPTPP에 합류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우리의 최대 수출국이자 수입국인 중국이 CPTPP 내 지위를 먼저 차지하는 것도, 우리와 주력 산업 구조가 비슷한 대만이 CPTPP에 먼저 가입하는 것도 한국에는 악재다.

지난 1일 국회 비준이 이뤄지긴 했으나, 정부가 RCEP을 준비하는 과정도 아마추어 같았다. 한국 정부는 이 협정을 1년 전인 2020년 11월 15일 체결했다. 그런데 이후 협정 비준안 처리를 1년 넘게 미루는 바람에 실제 발효는 내년 2월쯤에나 가능하게 됐다. 협정 발효를 위해서는 비준서 제출 후 60일이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다른 RCEP 참여국은 자국 내 비준을 부지런히 마쳐 2022년 1월 1일부터 서로 관세 혜택을 받게 됐다.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RCEP은 연평균 피해액이 77억원에 불과할 정도로 무역 개방도가 낮은 협정인데도 예상 피해 규모를 추산하고 보완책을 마련하는 데 1년이나 걸렸다”며 “정부가 시의적절하게 할 일을 하지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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