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강제동원 '은폐' 딱 걸린 일본..이번엔 "99엔도 못 준다"

지종익 입력 2021. 12. 5. 08: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99엔.

일본 정부가 2009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에게 지급한 돈입니다. 지금 원화로 환산하면 1,050원쯤 됩니다.

이 돈은 양 할머니가 일본에 강제동원됐을 당시 급여에서 떼인 돈으로 낸 후생연금의 탈퇴수당입니다. 물가상승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당시 계산대로만 지급한 겁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0~30엔에 불과한 지급 사례도 있습니다.

왜 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굳이 돈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강제로 노동을 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급여에서 떼인 돈이지만, 그래도 마땅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후생연금에 가입을 했다는 건 당시 일본의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을 했다는, 즉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증거이고, 탈퇴수당까지 받아냄으로써 그 입증 절차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으로부터는 어떤 자료도 받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찾아 나선 겁니다.

양금덕 할머니와 한날한시에 일본으로 끌려가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같은 날 귀국한 정신영(92) 할머니도 탈퇴수당 '99엔'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과 싸우고 있습니다.

정 할머니는 1944년 일본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항공기제작소로 끌려가 1년여간 일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을 돕는 나고야소송지원회는 지난 3월 정 할머니를 포함해 피해자 11명의 후생연금 기록을 조회해달라고 일본연금기구에 신청했습니다. 11명 중 생존해 있는 피해자는 정 할머니가 유일합니다.

취재진에게 후생연금 기록 조회 신청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 나고야소송지원회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


정 할머니의 후생연금 가입 여부는 자체적으로는 이미 확인이 끝난 상태입니다. 지원회는 과거 일본연금기구의 내부 자료를 열람했을 때 일부 피해자들의 연금번호와 근무지, 일본식 이름, 소대(지역) 등을 직접 확인했고, 그 중에는 정 할머니의 기록도 있었습니다.

나고야로 끌려간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나고야성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정 할머니는 생존 피해자였습니다.


지원회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정리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제시했지만, 일본연금기구의 반응은 "어떻게 일반인이 이런 자료를 갖고 있느냐"였습니다.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은 자료를 입수한 경위를 추궁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연금기구는 5월 나고야 지원회 측에 답변서를 보냅니다. 정신영 할머니의 '조사결과'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나고야항공기제작소'의 후생연금보험 가입자 명부를 조사했지만, 해당하는 가입기록은 없었습니다.

지원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일본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습니다.

지원회의 도움 요청에 응한 모토무라 노부코 일본 중의원은 상급기관인 후생노동성에 직접 조회를 요청합니다.

신청자만 달라졌을 뿐인데, 놀랍게도 후생노동성으로부터 정반대의 답변이 돌아옵니다.


후생노동성은 정 할머니의 기록이 '전쟁 중 사라졌지만 회복이 가능하다'며 구체적인 규정까지 언급합니다. '기록이 없다'고 했다가 5개월 만에 마지못해 말을 바꾼 겁니다.

기자 : 대답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 : "국회의원의 압력에 굴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더군요.

기자 : 그게 전부였습니까?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 : 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정 할머니의 후생연금 가입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지원회는 다시 일본연금기구에 탈퇴수당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문의합니다.

일본연금기구의 답은 '대리인에게는 지급할 수 없다'였습니다. 과거와 규정이 달라져 본인에게만 지급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존 확인 절차부터 거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과거 피해자들의 일본 측 대리인의 계좌로 탈퇴수당을 송금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추가 소송을 한 건이라도 막기 위해, 혹은 일본 측에 불리한 증거를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탈퇴수당 지급을 늦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 : 보통 일본의 행정절차를 생각하면 시간이 꽤 걸리겠죠?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 : 그렇습니다. 본인이 사망하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후생연금 가입 사실을 인정받고, 탈퇴수당까지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많지 않습니다.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 할머니의 사례만으로도 일본 정부의 태도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사경을 헤매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90세를 넘어서 100세 가까운 피해자들이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반드시 직접 당사자가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권리행사를 하지 말거나 제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잖아요.

만약에 병석에 누워있거나 거동이 힘든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스스로 포기하라는 말인지,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대리인을 통해서만 업무를 보도록 하는, 과연 그런 사례가 문명국가, 현대사회에 얼마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거동조차도 힘든 분들이 돈 천 원 받자고 일본까지 뛰어오라는 얘기인지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국언 대표 / 근로정신대할머니를 돕는 시민모임 대표

한국 정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운이 좋게 (후생연금 가입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분들이 일부 있겠지만, 누가 과연 이 어렵고 복잡한 절차를 뚫고 (기록 조회와 탈퇴 수당을) 신청할 수 있겠습니까?

2009년에 있었던 후생연금 '99엔'의 치욕스러운 사건 이후에 우리 정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아서 오늘 또다시 일부 피해 할머니들이 99엔을 면치 못하는 이 수모를 또 당하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정부가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가 후생연금 명부를 성의있게 제공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국언 대표 / 근로정신대할머니를 돕는 시민모임 대표

지종익 기자 (jigu@kbs.co.kr)

Copyright © K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