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빼지도 넣지도 못하고.." 주차가 괴로운 한국인 [전국은 주차 전쟁]

이환직 2021. 12. 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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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2500만대 돌파 눈앞
주차 장소 놓고 갈등 다반사
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경비원들이 주차 중인 차량들을 이동시키고 있다. 오대근 기자

#1 직장인 김모(33)씨는 최근 서울 용산구 원룸으로 이사 온 뒤 자동차를 주차장에 모셔두고 있다. 차를 빼는 일은 쉬워도 귀가하는 순간 시작되는 ‘주차 전쟁’에 끼지 않기 위해서다. 거주 중인 3층짜리 원룸 건물에 15가구가 살지만 주차장은 3면뿐인 탓에 벌어지는 전쟁이다. 김씨는 “원룸에서 400m가량 떨어진 공영주차장에 월 주차권을 사서 차를 대는 것도 고려했지만, 그곳도 차를 빼면 저녁에 다시 넣기가 힘들어 포기했다”며 “언제,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실어주던 정든 ‘애마’와의 작별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2 서울 양천구 한 아파트 단지 사이의 왕복 2차선 도로는 날이 어두워지면 1차선 도로로 변한다. 노선 시내버스가 다니는 도로지만, 인근 아파트 주민이 길 양쪽으로 사유지처럼 차를 댄다. 주말엔 낮에도 주차된 차량 때문에 이 길을 오가는 차들이 엉켜 길이 수시로 잠긴다. 아파트 주차장 주차는 2중, 3중이 기본이어서 길가에 세울 수밖에 없는 곳이다. 주민 박모(42)씨는 5일 “주민들이 주차를 벽돌 끼워 넣기 게임인 ‘테트리스’ 하듯 하다 보니 웬만한 운전 실력자가 아니고선 운전대를 안 잡는다”며 “멀쩡한 아파트를 뜯어내고 다시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실정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돼 모두가 이렇게 고통받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지난달 29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한 주택가 양쪽으로 차량들이 주차돼 있다. 이환직 기자

2021년 대한민국은 주차 전쟁 중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200만 대 남짓하던 한국의 자동차는 ‘마이카 붐’을 타고 급격한 증가세를 기록, 1997년 자동차 1,000만 대 시대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17년 만인 2014년 2,000만 대 시대로 들어섰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승용차 이용이 늘면서 수개월 내 2,500만 대 돌파도 눈 앞에 두고 있다.

도로도 자동차 증가세 수준으로 늘었지만, 주말이면 전국 도로가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동차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로가 아닌 주차장이다. 차를 댈 주차장이 없어도 돈만 있으면 누구든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나라, 한국 국민들이 치르는 대가는 지금 너무나 크다. 주차 장소를 놓고 싸우고, 인분을 뿌리는가 하면 살인(미수) 직전까지 간 사례도 부지기수다. 소방차는 화재현장 접근을 위해 골목에 세워진 차를 부수고 출동(서울 성동구)해야 하는 나라다.


"자동차 의존적 도로망·도시구조 문제"

세계 시장에 750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하는 ‘글로벌 톱5’의 자동차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이면이라고는 하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지나치게 자동차 의존적 도로망과 도시구조를 가진 데 따른 문제점의 하나”라며 “대중교통과 보행, 자전거 중심 도로망으로 전환과 함께 한국도 이제는 자동차 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진주 청주대 건축학과 교수는 “주택 공급자(건설사)를 배려하는 복잡한 주차장 설치기준을 버리고 '가구당 1대 이상'이라는 단순한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며 “일본과 같은 차고지 증명제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토교통부와 각 지자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2,436만 대로 10년 전(1,798만) 대비 35%가량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내 주차장 면적은 1,708만㎡에서 4,082만㎡로 140% 가까이 증가했다.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자동차 1대가 쉴 수 있는 공간은 늘었고, 주차난은 완화됐다고 할 수 있지만, 전국의 주차 갈등은 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조사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주차 관련 국민신문고 민원 건수는 314만 건에 달한다. 3년 전인 2017년(135만 건) 대비 배가 넘는다. 신문고에 접수되지 않은 건을 포함할 경우 어느 수준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주차면적 늘어도 주택가는 제자리걸음

주차면적 증가율이 차량 증가율을 크게 상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차난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대규모 주차장을 갖춘 대형 마트와 주상복합, 오피스 빌딩 등이 10년 사이 크게 증가했고, 그들이 갖춘 주차면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기존 아파트 단지나 다세대주택, 도시형생활주택 등 밀집 지역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즉 정작 주차장 공급이 필요한 주택가에는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아파트 단지 사잇길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교행이 불가능해진 시내버스가 후진을 해서 맞은편 버스에게 길을 내주고 있다. 김재현 기자

이 때문에 전국 곳곳에선 하루하루가 주차 전쟁이다. 지난달 26일 오후 경기 김포한강신도시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선 차량 여러 대가 빈 자리를 찾아 빙빙 돌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주차 면수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코너와 벽 주변에도 주차선을 그려놨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예 인근 상가 무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오는 주민들도 있었다. 한 주민은 "빈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중 주차를 하면 딱지(스티커)가 붙는다"며 ”김포한강신도시 아파트가 이런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수도권 대표 2기 신도시인 김포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지난달 30일 찾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아파트도 2중, 3중 주차된 차량으로 주차장에 빈틈이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주차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단지 앞 도로도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양쪽에 이중 주차된 차들로 왕복 2차선 도로는 0.5차선으로 줄어들어 아슬아슬 곡예운전을 해야 했다. 한 주민은 "주차장에 차가 없는 날은 1년에 설날, 추석 정도"라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해당 아파트의 주차면은 가구당 0.7개 수준. 각 가구당 차량을 한 대씩만 갖고 있다고 해도 열 집 중 세 집은 단지 밖에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근의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소득이 올라가면서 한 집에 차를 두 대 이상 가진 가구가 적지 않다”며 “단지 밖에 주차되는 차량은 그보다 훨씬 더 많고, 구청에서도 어쩔 수 없어 평일엔 야간, 주말ㆍ휴일엔 주야간 단속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양천구 목동 한 아파트 단지 부근에 주차 공간을 공유하면 월 10만원 이상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김재현 기자

사정은 제2 도시 부산도 마찬가지다. 부산 사하구의 3,000가구 규모의, 건축한 지 30년이 지난 한 아파트는 가구당 주차 대수가 0.8대지만, 곡예 수준에 가까운 3중 주차가 일상화한 곳이다. 관리사무소가 입주민회와 함께 단지 양방향 통행로를 일방로로 바꾸고 주차면을 늘렸지만, 한 집에 2대씩 차를 갖는 가구가 늘면서 한계 상황에 달했다. 한 주민은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 차량이 들어와 일방통행 구간을 역주행하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과 마주치는 곤란한 상황도 심심찮게 발생한다”며 “상황이 이래도 차량을 추가로 등록하는 경우 월 3만 원의 주차료만 부담하면 돼 아파트 등록 차량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아파트 차량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윤효석 권익위 제도개선 전문위원은 "가구당 자동차 보유 대수는 제한이 없는 반면 1인 가구, 맞벌이 가구는 늘고 있어 향후 주차난은 심화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주택가 주차전쟁 확대를 피하기 위해 한국도 선진국과 같은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차고지를 확보하지 않은 경우 차량 구매를 금지하는 일본의 ‘차고지 등록제’, 개인택시처럼 차량 구매 전에 운행 권리를 확보하도록 하는 싱가포르의 차량운행권리증명서(COE) 제도가 대표적이다. 과거 국내에서도 도입이 검토된 적은 있으나 이동의 자유 보장, 자동차 산업 발전 등의 목소리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이다. 김진유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자동차를 쉽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지만, 동시에 불법주차에 관대한 나라도 없다”고 지적했다.

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량들이 이중 주차돼 있다. 오대근 기자

이환직 기자 slamhj@hankookilbo.com
김재현 기자 k-jeahyun@hankookilbo.com
부산= 권경훈 기자 werth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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