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피해자들 내 가족이라 생각.. 마음 아파" [차 한잔 나누며]

김유나 2021. 12. 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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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장
韓 과학수사·현장감식의 '산증인'
유혈 낭자 현장 밥 먹듯 마주해
시신 무섭기보다 증거 채취 골몰
유영철사건 160번 지문 채취 성공
요오드 탓인지 갑상선 암도 걸려
환경 개선·노하우 전수하고 싶어
지금까지 그가 본 시신은 얼마나 될까. 김희숙(59·사진)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장은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 “글쎄요. 셀 수 없을 정도죠.” 밥 먹듯 마주하는 처참한 현장. 살인·변사 사건의 시신을 보는 것이 일상인 그는 시신 앞에서 조금 ‘차가운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시신을 그저 증거 중 하나로 대해야 업무를 버틸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따뜻했다. “시신을 볼 때면 늘 ‘이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이란 생각을 합니다. 가족이면 무섭다고 피하지 않고 더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지 않을까요?” 시신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는 김 팀장을 지난 2일 서울경찰청에서 만났다.

김 팀장은 한국 과학수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1982년 지문감식요원으로 경찰청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는 지문감정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2000년 현장감식 업무를 지원해 20년 넘게 현장에서 뛰고 있다. 과학수사 업무만 40년을 한 셈이다. ‘국내 1호 여성과학수사요원’, ‘국내 최장 현장감식 여경’, ‘국내 지문감정 일인자’ 등 그를 수식하는 타이틀도 화려하다. 그러나 이면에는 남모르는 고충도 많았다. 

강력살인 등의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현장감식반은 구더기가 들끓고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매일 마주 해야 한다. 김 팀장이 지원했을 때만 해도 여성은 없던 상황. 김 팀장은 “내가 제대로 못 하면 앞으로 여경이 이 일을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남들이 쉴 때도 공부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노력 덕에 지금은 김 팀장을 롤모델로 삼고 현장감식 업무를 하는 여경이 많아졌다.

시신을 보는 것은 무섭지 않았을까. 그는 “시신을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살해당한 시신의 모습은 정말 처참하다”면서도 “이 사람(시신)이 내 가족이라 생각하면 무섭고 끔찍하기보다는 그저 가슴 아프다. 빨리 증거를 찾아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부패가 심한 시신이 있는 현장에선 악취 때문에 통상 방독면을 쓰지만, 김 팀장은 거의 쓴 적 없다. 시신에 예를 갖추고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겠다는 마음에서다. “현장에 나가서 시신을 본 직원이 ‘밤새 악몽을 꿨다’고 하기도 해요. 그때도 전 ‘내 꿈에도 망자가 나와서 범인 힌트 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는 늘 시신에 말을 건다. 김 팀장은 “‘얼마나 무섭고 아프셨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사건 해결해드릴게요’라고 이야기를 하며 작업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가 160번가량 시도한 끝에 지문을 채취했던 ‘유영철 사건’의 일화는 유명하다. 최근 넷플릭스에 해당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인코트킬러’가 올라왔는데, 김 팀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한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영철은 신원 확인을 막으려 피해자 지문을 훼손한 상태였다. 김 팀장은 토막 난 손목을 들고 흘러내리는 부패액을 닦으며 밤새 지문을 찍고 또 찍었다. 김 팀장은 “잘 안돼서 울면서 ‘언니, 나 좀 도와줘요. 빨리 가족한테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 지문을 찍었다”고 말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결국 지문채취에 성공해 피해자 신원을 밝힐 수 있었다.

해결 안 된 몇몇 사건은 마음에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수없이 많은 사건을 접하면 무뎌질 수도 있지만, 그는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이야기할 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거나 한숨을 쉬었다. 모든 사건이 안타깝지만, 특히 아이가 피해자인 사건은 더 가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흔히 과학수사는 ‘몸으로 뛰는’ 업무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현장감식은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다. 현장에선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어 앉아서 쉬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렵다. 밥도 못 먹고 12시간 가까이 서서 일한 적도 있다. 화학약품을 많이 써 몸이 상하기도 한다. 김 팀장은 “어릴 적 성악가가 꿈이었을 만큼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지만 김 팀장은 일을 하면서 아이오딘(요오드)을 많이 썼어서인지 갑상선암에 걸렸어서 이제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며 “메탄올의 유독성을 잘 모르고 보호장구 없이 썼어서 시력도 많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현장감식 업무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해준다. “흔히들 과학수사는 ‘멋지다’고만 생각하지만 현실은 좀 다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소중한 증거를 채취해 사건을 해결할 때의 보람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김 팀장은 “현장감식은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트라우마 때문에 떠나는 직원도 있다”면서도 “어렵게  증거를 찾아 사건 해결에 기여했을 때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을 계속하는 원동력”이라며 웃었다.

김 팀장은 “과학수사는 중요한 업무지만 지금은 작업환경 등이 부족한 게 많다.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환경을 개선하는 업무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퇴직해서도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알려주면서 어떤 식으로든 과학수사에 매진하고 싶어요. 미래의 과학수사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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