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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50대 아저씨 눈물짓게 한 생일 문자폭탄의 정체는?

홍미옥 입력 2021. 12. 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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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88)

오전부터 휴대폰이 바빠진다. 갑자기 쏟아지는 문자와 카톡 알림음으로 몸살이 날 지경이다. 요즘 젊은이들 말마따나 '이게 머선 129?'가 따로 없다. 이상한 건 등록되지 않은 수상한(?) 번호와 낯선 이름들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내용은 한결같았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생일축하 단체 메시지는 요즘 트렌드. 갤럭시탭S6. [그림 홍미옥]


10월의 마지막 즈음, 한 통신사의 불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웠던 날이었다. 모바일그림을 그리는 모임 대화방에 재밌는 글이 올라왔다. 내용인즉슨, 오늘이 배우자의 생일인데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내의 지인들이지만 우수수 쏟아지는 축하의 말에 푹 빠지게 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워낙 솜씨 좋은 아내인지라 미역국을 비롯해 생일상을 거하게 준비해 놓았겠지만 무언가 특별하고도 따뜻한 양념을 더 얹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 경우는 전시회에서 스쳐 가듯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건 물론이고 회원들 대부분이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하지만 이토록 따뜻하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마다할 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커피 쿠폰이 부상으로 올라와 있으니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한참을 그렇게 카톡, 띵똥거리며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벤트가 계속되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뻔한 말 외에도 이런 아내와 함께하니 얼마나 좋으시냐,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느냐, 센쓰만렙의 부인을 모시고 사니 얼마나 행복하시나 등등. 분명 당사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만면에 미소가 끊이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축하 알림음이 잠잠해질 무렵 한 편의 시가 통신망을 타고 살포시 전해졌다.

문정희 시인의'부부'가 축하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사진 이정민]

■ <부부> 문정희</부부>

「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깃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시집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하는 공감 백만 배의 문정희 시인의 시 '부부'다. 별다른 풍파 없이 사는 부부에게도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구절구절이 압권이다. 많이 짜진 연고와 신용카드, 일심단결해 잡는 모기…. 공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그런 거, 이게 부부라며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구절들이다. 아마 최고의 생일선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자 폭탄이라면 언제든지 대환영


언제부턴가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귀신같이 메일이나 문자가 도착한다. 소소한 물건 몇 번 구매했을 뿐인 쇼핑몰을 필두로 해마다 보험료를 올리는 보험회사, 생일쿠폰을 미끼로 오늘도 날 유혹하는 홈쇼핑,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터넷 포털 등 아침부터 부지런히 울려댄다. 핑계 같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족들 생일조차 깜빡하고 지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전해지는 축하의 말을 기분 나쁘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겠다.

우리는 종종 휴대폰 저장용량을 걱정해서 중요하지 않은 문자나 메일은 지우곤 한다. 그날, 느닷없는 축하 폭탄 메시지를 선물 받은 지인의 남편은 어땠을까? 짐작건대 이런 폭탄이라면, 이런 메시지라면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센스 넘치는 아내의 귀여운(?) 이벤트에 감동하지 않을 남편은 없으니까.

살다 보면 배우자가 미워질 때가 있다. 아니 수시로 찾아온다. 그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 별거 아닌 이런 거에 감동하는 게 인생이지 뭔가. 혹시 그날의 통신망 사태는 우리가 보낸 문자 폭탄 때문은 아니었을까? 후후후….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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