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 오영수 "200명 인생 살았다, 결론은 하고픈 일 그냥 하라"

이지영 2021. 12. 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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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대학로서 연극 '라스트 세션' 출연


‘깐부’ 오영수(77) 배우가 무대로 돌아온다. 다음달 7일 서울 대학로 TOM 1관에서 개막하는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프로이트를 연기한다. 2019년 12월 ‘노부인의 방문’ 이후 2년여 만의 연극 출연이다. 1967년 극단 광장에 들어가며 배우 생활을 시작한 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긴 무대 공백기였다. 그사이 촬영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역으로 그는 이제 글로벌 시청자들에게도 유명한 얼굴이 됐다. 지난 9월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전세계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며 넷플릭스 시리즈 역대 최다 시청 시간 콘텐트에 등극했다.

6일 오전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오징어 게임’이 막 부상하면서 나 스스로 자제력이 없어지는 것 같이 느낄 때 ‘라스트 세션’ 제안을 받았다. 다시 연극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6일 오전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배우 오영수. 매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연극 '라스트 세션' 연습에 앞서 잠시 낸 짬이었다. 지난 10월 '오징어 게임'으로 대중적 인기가 급상승한 바로 그 때, 그는 연극 무대로 복귀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오징어 게임' 말고 연극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했던 그는 약속대로 연극 연습이 시작되자마자 먼저 인터뷰 일정을 잡자고 연락해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이미 ‘오징어 게임’의 들뜬 기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듯했다. 경기도 성남 집에서 대학로 연습실까지 매일 왕복 3시간을 지하철로 이동하며 그 시간에도 대본을 외운다고 했다. “대사량이 엄청나다. 관념적ㆍ상징적인 언어가 많아 집중적으로 암기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전달하기 어렵다. 이 나이에 배우로서 심판대에 오르는 거 같다”는 그의 눈빛엔 경력 55년 차 배우의 진지하고 비장한 설렘이 가득했다.

지난달 14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를 하고 있는 배우 오영수. 뉴스1

-공백이 길었다. 무대가 그리웠나.
“물론이다. 2년 동안 연극 안 하고 쉰 적은 처음이다. 2020년 1년 동안은 ‘오징어 게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코로나 영향도 있었다. ‘오징어 게임’이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첫 작품인데,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
“새로운 느낌이다. 예전엔 무대에서 좀 꾸미고 뭘 만들어보려고 했었다면, 요즘엔 꾸미는 거 그만하고 내 삶 그대로 해보자, 하고 있다.”

미국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쓴 ‘라스트 세션’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을 배경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가 신과 종교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내용의 2인극이다. 프로이트 역엔 그와 배우 신구가, 루이스 역에는 이상윤ㆍ전박찬이 더블 캐스팅됐다.

오영수의 연극 복귀작 '라스트 세션'. 지난달 23일 티켓 오픈 첫날 인터파크 예매 랭킹 1위에 올랐다. [사진 파크컴퍼니]


그는 ‘라스트 세션’에서도 ‘깐부’ 정신을 짚어냈다. “네것 내것이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하나가 되는 깐부 정신이 양극화ㆍ분열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이라며 “이 연극을 보고 나면 관객들은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결국 하나라는 마음을 안고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긴 연기 경력에 비해 TV나 영화 출연이 많지 않았다. 작품 선택 기준이 까다로운 건가.
“연기자로서 TV나 영화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역이라도 극 중에서 생명력이 있는 역할이면 기꺼이 출연한다. 상업광고도 안한다는 게 아니고 마음에 차지 않고 와닿지 않는 광고는 안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50대라면 세상에 나가고 싶고, 나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어 광고고 뭐고 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쭉 연극을 해온 지향점, 순수성에서 벗어나지 않고 갈 생각이다.”

-배우로 50년 넘게 이렇게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뛰쳐나가는 것도 조금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거 아닌가. 너무 힘들어 떨쳐나가고 싶어도 가진 게 없어 그냥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 아무것도 없었던 시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연기 외길을) 지키는 게 된 거 같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로 3년 전 급성폐렴으로 20일간 입원했던 시기를 꼽았다. ‘나도 가는구나’라고 생각했을 만큼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환희를 느꼈다고 했다. 이후 운전을 그만뒀고, 물질적인 욕심에서 자유로워졌다. “아 죽는구나, 하는 순간 돈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 살아나오니까 어떻게 사는 게 가치있는 삶인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국립극단에 들어가 전속단원제가 폐지된 2010년까지 간판 배우로 활동했다. 정년 보장에 안주한 일부 단원들의 타성에 젖은 연기 탓에 전속단원제가 폐지된 일을 두고 그는 “더 반대했어야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배우들이 20년, 30년씩 연극 무대에서 버틸 수 있는 토대가 사라져버린 데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모두 영화ㆍTV로 가려고 하니, 이제 연극은 젊은 배우들만 한다”면서 “인생은 빠져버리고 사건만 있는 연극이 돼버렸다”고 쓴소리를 이어갔다.

그는 인생의 멘토 장민호(1924∼2012) 선생도 국립극단에 만났다. “연극은 호흡이다. 호흡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기력이 나온다. 선생은 그걸 잘하는 분이었다. 그분 밑에서 20년 이상 있었던 게 큰 원동력이 됐다.”
그는 장민호 선생의 마지막 작품 ‘3월의 눈’(2011)의 장오 역을 선생과 번갈아 연기했다. 당시의 일을 그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느날 선생이 공연하는 회차였는데 그에게 와달라고 했다. 버티기가 힘들다면서 무대 막 뒤에 있다가 공연을 끝내고 들어오는 선생을 안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대사를 할까’ 지켜보는 그는 내내 걱정이 됐다. 하지만 선생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감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공연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막 뒤로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안겨 5분 동안 말도 못하고 헉헉 거렸다. 그는 “무대에서 ‘기력’으로 승리한 위대한 배우”라며 “나도 장민호 선생 같은 배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영수. [사진 넷플릭스]


그도 “무대에 서면 기력이 나온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 촬영을 하면서도 그런 기력을 느낀 순간들이 있다. 구슬치기 장면에서 기훈(이정재)에게 “자네가 날 속이고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라고 말하는 장면, 또 죽기 전에 “뭘 하면 좀 재미가 있을까”라고 하는 장면 등이다. 그는 “배우의 그런 기력은 시청자·관객에게도 전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전엔 무대에서 평소 말 못하던 것을 쏟아부을 때 전율을 느꼈지만, 이젠 관객들과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얘기하고 싶은 심정으로 연기를 한다”고 전했다.

-데뷔 이후 200여 편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동안 연기하며 얻은 깨달음이 있나.
“200여 명의 다양한 인생을 살아보고 얻은 결론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그냥 하라는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감이 제일 앞에 있어야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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