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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미·중간 외줄타기의 위태로움

남정호 입력 2021. 12. 07. 00:36 수정 2021. 12. 07.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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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종전선언 집착 문 대통령
서훈,양제츠 만나 중국 지지 부탁
바이든의 대중 봉쇄 거절할 수 있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미·중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는 9일 110여개국 정상이 참가한 가운데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도할 예정이다. [AP]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은 서럽다. 툭하면 양국 눈치를 한꺼번에 봐야 하는 신세로 몰린다. 이틀 뒤인 9일 개막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도 그런 자리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주도로 열리는 이번 온라인 회의는 110여 개국 정상이 참가하나 진작부터 타당성 논란에 시달려왔다. 민주주의 수호란 명분에 걸맞지 않게 터키·필리핀·이라크 등 권위주의 국가의 지도자 여럿이 초청된 탓이다. 반면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반독재 인사 등은 못 왔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1월 대선 직후 투표 결과에 흥분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민주주의 국가가 맞냐"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나라가 반민주주의와 싸우겠다고 나섰으니 "너나 잘해라"란 조롱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3월 미 프리덤하우스 조사 결과 미국의 '세계 자유 지수(global freedom index)'는 2010년 94점에서 2020년 83점으로 떨어져 아르헨티나·크로아티아·몽골보다 못했다.
이번 정상회의가 허울은 민주주의 수호지만 중국과 러시아 봉쇄를 위한 국제적 스크럼 짜기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으로서는 여간 난처하지 않다. 참가국엔 권위주의 세력 억제를 위한 국내외적 아이디어와 실천 방안을 내게 돼 있다. 자칫 중국의 분노를 사기 십상이다.
요즘 문재인 정권은 임기 말임에도 어떻게든 종전선언을 이뤄내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종전선언이 성공하려면 미·중 양쪽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수다. 지난 2일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톈진으로 달려가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에게 종전선언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중국 외교부가 낸 보도 자료에는 종전선언 얘기가 쏙 빠져있다. 중국이 종전선언에 대해 심드렁하단 의미일 수 있다. 이런 판에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가한 문 대통령이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에 적극 참여하면 어찌 될지는 뻔하다. 그러면서도 종전선언의 또 다른 열쇠를 쥔 바이든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문 정부로서는 이도 저도 곤란한 궁지에 몰린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일단 때를 기다리는 게 정답이다. 미·중 관계가 나아져 양쪽으로부터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머잖아 올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임기 전에 종전선언을 어떻게든 끝내겠단 집착에 빠져 잘못을 이어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차기 정부에 북·미, 남북 대화가 진행 중인 상황을 물려주기 위해 종전선언을 제안했다"고. 하지만 이는 희망 사항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간 보수·진보 간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대북 정책은 기조가 유지된 적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시작돼 노무현 정부로 이어졌던 대북 포용정책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 때의 대북 강경노선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제2의 포용정책 격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대체됐다.
보수를 대변하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에 비판적이다. 그는 지난달 12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종전선언만 먼저 하면 정전 관리체계나 유엔사가 무력화되기 쉽고 주한미군 감축 여론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 대선 판세는 윤 후보가 진보적인 이재명 후보를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상황이다. 정권교체 시 운명을 알 수 없는 종전선언을 두고 북한이 선뜻 나설지 의문인 것도 이 때문이다.
진작 보수진영의 의견도 수렴해 대북 정책을 빚었다면 정권교체 후 기조가 바뀔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선이 100일도 안 남은 상황에서 북한이 종전선언 카드를 덜컥 받을 거로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러니 집착을 버리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게 그나마 향후 실책을 줄이는 길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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