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훔친 사람을 보지 말고, 살아남은 돼지를 보라

이현우 입력 2021. 12. 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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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이현우 기자]

'지붕 위 소'를 기억하는가. 지난 2020년 여름 홍수에 지붕 위에 올라가 간신히 살아남은 소들이 있다. '90310(농림축산식품부 축산물이력제에 따라 가축에게 부여한 번호)'은 지붕 위 소 중 하나다.

물난리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90310은 우리 사회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 살점과 뼈로 분리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이른바 '고기'가 된 것이다. 우리의 식탁에 올라갔거나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적에는 주목하지만 매일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

구조된 이후에도 투쟁의 삶을 사는 새벽이
 
 도서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 이현우
여기 또 다른 기적 '새벽이'가 있다. 새벽이는 2019년 경기도 소재 종돈장에서 구조된 돼지다. 하지만 지옥 같은 종돈장에서 새벽이가 구조되었다고 해서 이후 새벽이의 일상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책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가 출간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임시보호처에서 활동가의 집으로, 그리고 생추어리(이른바 보호구역.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동물을 구조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돌보는 시설)까지 새벽이가 걸어온 발자국을 기록한 책이다. 잔혹한 이 사회에서 온몸으로 투쟁하는 새벽이를 비롯한 동물권 활동가들의 투쟁사(史)다.

새벽이는 인간에 의해 구조됐고 생추어리는 인간에 의해 마련되었다. 바로 오늘도 새생이(생추어리를 운영하는 활동가)와 매생이(생추어리 후원자), 보듬이(생추어리 돌봄 활동을 하는 활동가)의 활동이 아니면 새벽이의 삶은 유지될 수 없다. 이쯤에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것이다.

'어차피 인간에 의해 살아가는 새벽이와 새벽이가 살아가는 생추어리로 동물해방을 말할 수 있는가?'

왜 생추어리인가?

새벽이 생추어리는 물리적으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다. 초록색 울타리로 둘러싼 100평 남짓한 땅. 외형적 모습만으로 볼 때, 좀 더 넓어진 가두어진 우리로 볼 수도 있겠다. 돼지가 살기에 절대 적합한 장소는 아니다. 동물해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공간조차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생추어리를 마련하고 유지하는 모든 과정은 투쟁이었다. 도심에 돼지가 살 땅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고 땅값이 저렴한 도심 외곽 지역에는 곳곳에 도살장과 농장이 즐비했다. 곳곳에 '살처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의 생추어리는 여러 사람의 소개와 도움으로 어렵사리 탄생하게 되었다.

내몰린 그곳에서 새벽이와 활동가들은 지금도 "죽고 싶지 않다. 살 권리를 보장하라!"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이는 내몰린 난민이고 생추어리는 투쟁과 저항의 공간이다. 생추어리는 지상낙원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올 동물해방 세상의 주춧돌을 쌓아가는 공간이 될 것이다.
 
"생추어리는 지상낙원이나 동물해방이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는 동물해방을 상상할 수 있다."
- 72p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새벽이가 구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물권 단체 서울애니멀세이브에서는 도살장 앞에서 비질(vigil, 도살장 등을 방문해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동을 통해 진실의 증인이 되는 활동)을 진행한다. 도살장에는 새벽이와 같은 수많은 존재들이 매 순간 죽음을 앞두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온몸으로 투쟁하고 저항한다. 돼지들은 서로의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비명을 내지른다. 모순적이게도 사체가 널려 있는 도심은 무척이나 고요하다. 마트와 정육점, 집 안의 냉장고, 음식물쓰레기봉투 안까지 말이다.

서점의 서가를 둘러보자. 파스텔톤 책이 가득하다. 그중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그 속에서 붉게 빛나는 '빨간' 책이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가 서점 서가에 꽂혀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동물 관련 도서들은 우리와 가깝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개와 고양이에 대한 서사로 가득하다. 혹은 우리의 일상과 꽤 멀다고 생각하는 야생동물 이야기가 대다수다. 반려동물, 야생동물 등은 분명히 필요한 이야기 주제들이다. 하지만 왜 이런 이야기들만이 인기 있을까.

멀리 있어야만, 보이지 않아야만, 들리지 않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육장과 도살장의 동물들이 그렇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의 저자들은 디엑스이코리아 동물권단체 활동가다. 그들은 도살장의 비명소리와 시뻘건 피를 도심으로 가져온다. 죽음과 고통을 전달하고 이 사회와 인간동물의 폭력을 증언한다. 이 책은 기필코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90310은 인간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지만, 결국 인간에 의해 도살되었다. 반면 새벽이는 기적적으로 생존하여 투쟁과 저항으로 생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2020년 기준 소는 88만 6천(하루 평균 2427건 ), 돼지는 1832만 9천(하루 평균 5만 216건)이 도살된다. 오늘도 2427의 생명체인 '90310'은 도살되고 5만 216의 생명체는 또 다른 새벽이는 도살되어 곱창, 갈비, 삼겹살 등의 이름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이 책은 읽는 이들의 밥상뿐만 아니라 일상을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책이다. 하지만 그 어떤 책보다 안전한 사회를 꿈꾸고 말하는 책이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책을 읽은 후 이 문장을 다시 보라. 그때 다시 묻고 싶다. '훔친 사람'이 보이는가, '살아남은 돼지'가 보이는가?
 
"세상은 '절도'라고 했고 그들은 '구조'라고 했다."
- <그냥 사람> 홍은전 저자의 추천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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