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이재명은 합니다" vs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입력 2021. 12. 9. 00:26 수정 2022. 1. 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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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슬로건 읽기


생각의 공화국
관심을 끌려면 슬로건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Just do it, 그냥 해버려)’ 같은 것. 스포츠용품 판매 업체 슬로건답게, 운동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의 마음을 포착하고, 등을 떠민다. 대통령 후보들에게도 슬로건이 필요하다. 1956년 대통령 선거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하면 된다” 같은 것. 듣고 있으면 피가 끓는 듯하다.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도 슬로건 같은 언명을 남겼다. “한다면 합니다.”

현재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두 대통령 후보의 슬로건을 꼼꼼히 읽어보자.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세세히 의미를 따진다는 것이다. 왜 하필 그렇게 말했는지를 새삼 질문한다는 것이다. 표면 아래 잠복해 있는 의미까지도 탐색한다는 것이다. 침묵하는 것까지도 간파해낸다는 것이다.

「 목적어·방법 빠진 이재명 슬로건
윤석열 슬로건은 충성 대상 생략
효과적인 구호는 집단의식 형성
그들이 침묵한 것들에 질문해야

이재명‘이’와 이재명‘은’의 차이점

먼저 여당 이재명 후보의 슬로건, “이재명은 합니다”를 읽어보자. “합니다”라는 것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기력·두려움·무지 등의 이유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은 에너지의 분출을 전제로 한다. 독자는 물을 수 있다. 그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분노인가, 의협심인가, 공명심인가, 정의감인가, 권력의지인가.

조사를 읽어보자. “이재명 ‘이’ 합니다”와 “이재명 ‘은’ 합니다”는 다르다. “이재명은 합니다”는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따라서 누가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유발한다. “현 대통령은 하지 않지만, 나 이재명은 하겠다”는 뜻이거나 “다른 후보들은 하지 않지만, 나 이재명은 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침묵을 읽어보자. “이재명은 합니다”는 목적어에 대해 침묵한다. 한다니,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말일까. 이것은 전략적 침묵이다. 슬로건의 경우, 문장이 간명할수록 힘이 있기 마련이다. 할 일을 나열하다 보면 문장이 늘어진다. 할 일을 명시해 놓으면, 왜 어떤 건 빼놓았냐고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 혹은, 본인도 아직 뭘 할지 충분히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아예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권력자가 떠안을 책임과 위험

목적어를 생략해서 지지자들의 상상을 자극할 수 있다. 지지자들은 상상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 공백을 채운다. “부동산 문제 해결을” 합니다, “실업 문제 해결을” 합니다. “대학 입시 문제 해결을” 합니다. 전략적 침묵에는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도 자기 멋대로 그 침묵을 채워 넣게 된다. “개발사업을 합니다” “욕설”을 합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침묵은 사람들의 상상을 추동하고, 그 상상을 완벽히 통제할 방법은 없다.

목적어만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방법도 침묵하고 있다. “이재명은 합니다”에는 ‘무엇을’뿐 아니라 ‘어떻게’도 빠져 있다. 적법한 일만 하겠다는 걸까. 불법의 소지가 있더라도 하겠다는 걸까. 모든 이의 동의를 구해서 하겠다는 걸까. 반대가 있더라도 밀어붙여서 하겠다는 걸까.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기어이 하겠다는 걸까.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가며 하겠다는 걸까.

"이재명은 합니다”는 대통령으로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이 쥘 수 있는 가장 큰 정치적 권력을 쥐고서 하겠다는 말이다. 하루살이가 "하루살이는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킹콩이 “킹콩은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은 무게감이 다르다. 큰 권력을 쥔 사람이 떠안아야 할 책임과 영광과 위험이 여기에 있다. 잘하면 영광스럽되, 잘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잘하면 매우 큰 긍정적인 변화가 오지만, 잘못하면 재난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임기를 마친다면, 평가도 슬로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임기를 마치며 대통령 이재명이 말한다. "전 한다면 합니다.” 지지자들이 말한다. "진짜 했구나.” 비판자들이 말한다. “하는 척했다” 혹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어쨌거나 퇴임 후에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이재명은 무엇을 했냐고.

사람이 아니면 무엇에 ‘충성’?

야당 후보의 슬로건은 어떤가. 만약 윤석열 후보의 슬로건이 "윤석열은 안 합니다”였다면, 이재명 후보와 비교가 편했을 것이다. 하는 사람 대 안 하는 사람의 치열한 대결. 그러나 윤석열 후보 측은 "기득권의 나라에서 기회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고, 김동연 후보는 이에 표절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공식 슬로건은 아니더라도 윤석열 후보를 대표하는 언명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가 아닐까. 국민에게 윤석열이란 인물을 각인시키고, 그를 대통령 후보 자리까지 오게 했던 동력의 상당 부분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가진 힘이었을 것이다.

충성은 위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충성을 운위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몸 바쳐 따르려는 존재이다. 윤석열 후보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지, 충성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충성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역임한 검찰총장직은 충성을 구현해야 하는 위계적 조직의 일부다. 그러던 그가 위계적 조직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되면, 그는 충성할 대상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독자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가 침묵하는 바에 대해 물어야 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에 충성한다는 말인가. 만약 선거에서 당선된다면, 대통령 윤석열은 어디에 혹은 무엇에 충성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에 나오는 "사람”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인사권자였던 현 대통령 개인을 지칭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 후보는 특정 개인에 대한 거부감을 표한 것에 그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는 말이 (누가 되었든) 특정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면, 윤석열 후보는 근대국가의 작동 원리를 천명한 셈이 된다. 왕국과는 달리 근대국가는 특정 인격이 국가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은 충성의 대상에 대해 침묵한다. 이 또한 전략적 침묵일 수 있다. 결국 무엇에 충성하는지에 대해 침묵한 결과, 지지자들과 비판자들은 상상을 통해 그 공백을 채워 넣을 수 있다. 검사조직을 맹렬히 옹호하는 이들은 검사조직에 충성하기를 상상하고, 보수 원로는 보수파에 충성하기를 상상하고, 당권파는 정당에 충성하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슬로건과 공적인 외침

만약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임기를 마친다면, 평가도 슬로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임기를 마치며 대통령 윤석열이 말한다. “국민에게 충성했습니다.” 지지자들이 말한다. “나라에 충성했다고.” 비판자들이 말한다. 충성하는 척만 했다고. 자기 지지자에게만 충성했다고, 검사 조직에만 충성했다고, 처가에 충성했다고, 혹은, 충성 말고 뭘 할 수 있었냐고. 등등. 어쨌거나 퇴임 후에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윤석열은 무엇에 충성했냐고.

정치적 슬로건은 심사숙고의 결과다. 이재명은 안 합니다, 이재명은 할지도 모릅니다, 이재명은 해버린다, 이재명은 했었다, 이재명은 하는 둥 마는 둥, 이재명은 할까 말까 등등, 여러 후보작의 경쟁을 거쳐 등장한 것이 “이재명은 합니다”일 것이다. 사람에게 효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협박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애완견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식물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등등, 여러 후보작의 경쟁을 거쳐 등장한 것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일 것이다.

심사숙고 끝에 탄생한 정치적 슬로건은 후보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슬로건은 만연한 집단의식을 포착하고, 거기에 적절한 형식을 부여했을 때 비로소 임팩트가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슬로건은 주관적 선언을 벗어나 공적인 외침이 된다. 일단 공적인 외침으로 자리 잡고 난 다음에는, 집단의식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의식을 형성해나가기까지 한다. 마치 ‘저스트 두 잇’이 운동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의 마음을 포착할 뿐 아니라, 없었던 운동 욕구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것처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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