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는 스포츠"라는 데 동의 하나요 [오태식의 골프이야기]

오태식 2021. 12. 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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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KLPGA 제공>

골프는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는 스포츠다. 이 말에 수긍할 골퍼들이 꽤 많을 것이다. 골프를 하다 보면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데, 잔뜩 겁을 먹을 때가 있다.

1m도 채 되지 않는 퍼팅을 남겨 뒀다. 주말 골퍼라도 평소 같았으면 툭 치기만 해도 들어갈 거리인데도, 수많은 톱골퍼들이 이 거리에서 퍼팅을 놓치고 좌절하는 장면을 많이 지켜봤다. 올해만 해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시즌 마지막 대회인 SK쉴더스·SK텔레콤 챔피언십 최종일 박주영은 생애 첫 우승의 기회를 잡았지만 1m도 훨씬 못 미치는 거리에서 퍼팅을 놓치면서 역전의 빌미를 줘 결국 유해란에게 우승을 안겨줬다.

그린 앞까지는 고작해봐야 100m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 앞에 워터해저드가 턱하니 가로 질러 있다. 이럴 때도 골퍼는 겁쟁이가 된다. 해저드를 무시하고 평소대로 샷을 한다면 핀에 붙여서 버디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만 머릿 속에는 '해저드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가득찬다. 잔잔하던 마음에 쓰나미급 파도를 일으키는 원흉은 바로 '겁'이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제5의 메이저 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챔피언십의 대회장 TPC 소그래스 17번홀(파3)은 핀까지 거리가 132야드에 불과하지만 톱랭커조차 열명 중 한 명꼴로 공을 물에 빠트린다고 한다. 최고의 스윙을 갖고 있는 톱골퍼들조차 해저드가 앞을 턱 가로막으니 마음 속에 '겁'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지 골프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는 골퍼들도 있다. 거침 없이 연습 스윙을 하다가도 정작 골프공을 치려고 하면 몸이 잔뜩 경직되는 골퍼들이다. 실제 스윙을 연습스윙처럼만 한다면 누구라도 싱글 핸디캡 골퍼가 될 수 있을텐데,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골프의 세계다.

골프에는 '마음의 병' 입스(yips)라는 것이 있다. 실패에 대한 겁이나 두려움으로 극심한 불안감이 찾아와 심하면 몸에 경련까지 일으키는 게 입스다. 박인비조차 입스로 고생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8년 11월 말. 당시 20세였던 '미래 골프여제' 박인비는 LPGA 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ADT 챔피언십에서 한 홀을 남겨두고 돌연 기권을 선언했다. 나중에 박인비가 밝힌 사연은 치명적인 골프병 '입스'에 걸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샷 난조로 너무 많은 공을 잃어 버려 마지막 남은 공마저 18번 홀에서 잃어 버리면 공이 없어 퇴장당한 LPGA 1호 선수가 될 것 같아 기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입스에 걸렸던 프로골퍼들의 당시 심정을 들어 보면 골프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다는 데 동의하게 될 것이다.

박인비는 "(입스에 걸렸을 당시) 코스에 나가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김대섭은 "드라이버를 잡으면 마치 쇳덩이를 든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볼이 2개로 보일 때도 있었다"고 했고 김경태도 "티잉그라운드에만 서면 가슴에서 '쿵쾅 쿵쾅' 뛰는 소리가 들렸다"고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다.

골프는 겁쟁이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골프를 통해 두려움을 이겨 내고 성장해 나가기도 한다.

무려 4년이나 입스를 동반한 슬럼프와 싸웠던 박인비는 결국 그 어려움을 헤쳐 나와 골프 여제가 됐고 김대섭과 김경태도 입스를 극복한 뒤 여러 차례 챔피언에 등극했다.

2007년 솔모로오픈 때 11개 홀에서 12개나 OB를 낸 뒤 기권하는 등 한때 드라이버 입스로 8년이나 고생했다는 장타자 김태훈도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난 해 KPGA 투어 대상과 상금왕을 차지하는 등 뒤늦게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한 재계의 총수가 "소심한 더블보기보다는 과감한 트리플보기가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분명 골프는 겁쟁이를 여럿 만들지만 그 한계에서 벗어나면 더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스포츠이기도 한 것이다. [오태식 골프포위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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