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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0] "죽을 때까지 처녀였노라" 여왕은 이 묘비명을 원했다

장일현 기자 입력 2021. 12.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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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회색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하얀색 벨벳 드레스 위로 철제 갑옷을 입었고, 머리엔 깃털장식 투구를 썼습니다. 손에는 지휘봉이 들었습니다.

수행원은 단 6명. 오르몬드 백작이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국가의 검(Sword of State)’을 쳐들고 앞장섰고, 말고삐를 잡은 시동과 여왕의 투구를 올려놓는 쿠션을 든 수행원, 여왕을 태운 말이 뒤를 이었습니다. 말 옆구리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여왕의 오른쪽엔 레스터 백작이, 왼쪽엔 에식스 백작이 걸었고, 맨 뒤엔 여왕의 모든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존 노리스 경이 따랐습니다.

◇ 틸버리 연설

1588년 8월 9일 잉글랜드 남동부 에식스의 틸버리항 인근. 만 55세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침략에 대비해 소집된 4500여명의 민병대 앞에서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만든 연설을 하려 합니다. 바로 ‘틸버리 연설’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틸버리 연설

틸버리는 템스강 하류쪽에 있는 항으로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가 건설했으며, 런던 시내에서 직선 거리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 이 연설 내용을 떠올릴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마치 활화산 용암처럼 뜨겁게 감동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이 여왕을 존경하고 좋아하게 됐고, 이런 군주를 가졌던 영국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연설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힘없고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겐 왕으로서의,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I know I have the body of a weak, feeble woman. But I have the heart and stomach of a king, and of a king of England too).”

“사랑하는 나의 백성들이여”로 시작하는 이 연설 곳곳에는 이외에도 나라를 이끄는 군주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대들이 눈으로 보듯이 나는 이곳에 왔노라. 오락이나 장난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서 그대들과 함께 살고, 그대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서.”

“나의 하나님과 나의 왕국, 나의 백성과 명예, 피를 위해 쓰러지겠노라. 비록 그곳이 먼지 속일지라도.”

“(평생) 불명예와 함께 살기보다 무기를 들 것이다. 내가 그대들의 장군이자 심판자, 이 전장에서 그대들이 보여준 모든 미덕에 대한 보상자가 되리라.”

여왕이 연설을 한 날은 잉글랜드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입니다. 적 해군은 물리쳤지만, 도버 해협 건너 덩케르크 지역엔 여전히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에스파냐 대군이 있었습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땅으로 실어나르려 했던 그 군대였지요. 여왕은 적이 언제라도 잉글랜드를 침략할 수 있기에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군영(軍營)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틸버리에 모였던 군대는 곧 해산합니다. 파르마 공작의 군대가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으니까요.

◇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

영국에는 여왕이 여러명 있습니다. 첫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의 언니 메리 1세(1553~1558), 그 다음이 엘리자베스 1세, 명예혁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메리 2세(1689~1694),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1702~1714),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던 빅토리아 여왕(1837~1901), 현재 왕인 엘리자베스 2세(1952~현재) 등입니다. 이 중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유일한 여왕이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그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양한 추측들이 나올 뿐입니다.

이와 관련 엘리자베스 1세를 또 한번 역사가 주목하게 만든 명장면이 있습니다. 여왕이 즉위한 다음해, 즉 1559년 2월 10일 의회가 열렸습니다. 여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의회로부터 결혼할 것을, 그리고 만약 그가 상속자를 낳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미래 왕위 계승자를 지명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의회에 참석한 여왕은 자신은 결혼하지 않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이미 남편과 혼인 서약을 했소. 바로 잉글랜드 왕국이라는 남편과.”

이때 여왕은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며 즉위식 때 낀 반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러면서 “그대들은 내가 잉글랜드와 맺었던 그 서약을 잊지 않았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결혼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더들리입니다. 그는 여왕의 어릴 적 친구인데, 여왕 즉위와 함께 여왕의 말 관리인으로 임명됐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된지 얼마 안돼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는 “여왕이 밤낮으로 더들리의 침실을 방문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총 45년의 재임 기간 동안 딱 14명을 귀족으로 임명했고, 그가 죽을 때 작위 귀족 수는 6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들리가 1564년 레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여왕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562년 여왕은 천연두에 걸려 거의 죽을 뻔 했는데, 의식이 돌아온 순간 자신이 죽으면 더들리를 왕국의 섭정관으로 세우고, 그에게 연 2만 파운드의 엄청난 연봉을 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 더들리

그렇다고 여왕이 더들리와 성적 관계를 갖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왕은 “하나님이 증인”이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부적절한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죽을 때까지 더들리를 마음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여왕이 죽었을 때 침실에서 발견된 작은 상자에는 더들리가 1588년 9월 죽기 직전 여왕에게 쓴 편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편지에는 여왕이 직접 “그의 마지막 편지”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더들리는 말라리아와 위암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들리와의 사랑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습니다. 더들리가 이미 기혼자였고, 윌리엄 세실 국무상 등 충신들이 극구 말렸기 때문입니다.

외국 왕과 귀족들의 구애도 많았습니다. 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메리 1세가 죽자 펠리페 2세는 그 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프랑스에 맞서 잉글랜드-에스파냐 동맹을 맺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가톨릭 종주국을 자임하는 에스파냐의 왕과 개신교 중심으로 떠오른 잉글랜드 여왕의 결혼은 불가능에 가까웠지요. 언니 메리 1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와 결혼을 강행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이 청혼은 ‘언감생심’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나중에 여왕과 펠리페 2세는 극한 대립을 거듭했고, 1588년 칼레 해전으로 세기의 전투를 벌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여왕은 즉위 전에는 스웨덴의 왕 에릭 14세, 덴마크의 아돌프 공작과 프레드릭 2세 등과 혼담이 있었고, 즉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샤를 대공, 앙주 공작이었던 앙리와 그의 동생 프랑수아 등과도 결혼 얘기가 오갔습니다. 하지만 종국에 모든 혼담은 없던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만약 결혼을 했다면 그건 정치적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을 판단했을 때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인지 판단했을 것이고 둘째, 왕권 유지와 국내 안정을 위해 누구와 결혼하는게 유리한지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여왕이 결혼을 포기한 건 그 또한 정치적인 이유였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고 판단하는 게 가장 합당하겠지요. 어찌됐건 1570년대 이후로는 의회도 여왕에게 결혼을 압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서 얘기한 1559년 의회에서 여왕은 이런 말로 연설을 끝맺었습니다.

“나의 비석엔 이렇게 새겨질 것이오. ‘그 시대를 다스렸던 여왕은 처녀로 살았고, 처녀로 죽었다’. 그거면 나는 족하오.”

◇ 처녀 여왕의 부국강병

잉글랜드는 유럽의 최강 중 하나로 꼽기엔 부족함이 적잖은 나라였습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그의 책 ‘전쟁의 역사’에서 16세기 상황에 대해 “잉글랜드는 비교적 낙후된 나라였고, 인구도 모두 합쳐 400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에스파냐의 인구는 700만명, 프랑스는 1000만명이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만든 신세계’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600년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는 420만명이었고, 네덜란드 인구는 150만명이었던 반면, 에스파냐는 810만명, 프랑스는 2000만명이었다. 게다가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비해 훨씬 부자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는 자료나 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잉글랜드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인구도 적고, 나라의 부(富)도 뒤처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거나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방법은 ①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거나 ②자신이 재정을 알뜰하게 운영하거나 ③농업과 상공업 등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등 셋 중 하나이거나 그들의 조합이었을 겁니다. 역사에서 대부분의 왕들은 주로 ①번을 선호했지요. 여왕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점에서도 성군(聖君)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여왕은 45년 치세 동안 의회를 총 10번(회기 기준 13번) 소집했습니다. 회기의 지속 기간은 평균 2개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의회의 발전 과정에서 살펴봤듯이 잉글랜드 의회는 세금 징수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의회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에선 의회가 발전하면서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정립됐습니다. 평상시 국왕은 자신의 수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의회에 예산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돈이 필요할 때면 의회를 소집해 어떤 세금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0번의 의회 중 여왕이 세금을 요청하지 않은 의회는 딱 한번에 불과했습니다.

여왕이 의회를 많이 소집하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건전한 재정 운용으로 돈이 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연 평균 수입은 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10분의 1 수준밖에 안됐지만, 여왕은 아껴쓰고 절약해서 나라 재정은 계속 흑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국가 운영은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돈을 펑펑 쓰는 스타일이었던 반면, 할아버지 헨리 7세는 내실있는 국정 운영으로 나라 곳간을 채우는 식으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여왕은 돈을 너무 아껴서 ‘구두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는데요. 그런 면모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다른 강국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것입니다. 여왕의 치세 때 잉글랜드의 재정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꺼리던 여왕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이 흑자 덕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왕이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반란을 지원하기 직전, 즉 1584년 잉글랜드의 재정은 약 30만 파운드의 누적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전쟁을 준비할 때조차도 되도록이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자신이 힘 닿는 데까지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왕은 즉위 초 스코틀랜드 개신교를 지원했을 때, 무적함대와 싸웠을 때, 1590년대 아일랜드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왕실 토지를 대량으로 처분했다고 합니다. 1581년부터 여왕이 사망한 1603년까지 잉글랜드가 쓴 전쟁 비용은 총 3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이중 180만 파운드는 의회가 거둔 조세 등으로 마련했고, 나머지는 평소 쌓아놓은 재정 흑자와 왕령지 매각으로 조달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화페개혁과 상공업 진흥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금융 시장에는 불량화폐들이 넘쳤습니다. 순도가 낮은 은으로 만든 화폐, 가장자리를 깎아낸 화폐 등이 대량 유통됐습니다. 여왕은 이런 불량 화폐를 거둬들이고 실제 함유된 은이 화폐 가치와 일치하는 경화를 발행했습니다.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이 안정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왕 시대에 제철업을 비롯한 금속 공업도 크게 발전했고, 난방과 각종 산업에서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석탄 산업은 괄목할만큼 성장했습니다.

대륙에서 탄압받던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인 것도 신의 한수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왕은 이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네덜란드 지역(저지대) 등에서 칼뱅파와 위그노 등 개신교도들이 잉글랜드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은 단지 사람이 건너왔다는 의미를 넘어 기술과 지식, 자본 등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잉글랜드 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요. 예를 들어, 프랑스 칼뱅교도인 위그노들은 엘리자베스 1세 때 처음 유입됐는데, 이 중에는 기업가와 금융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 신직물을 짜는 직조 기술은 박해를 피해 온 네덜란드의 칼뱅교도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플랑드르 등 스페인 지배하에 살던 저지대 지역 프로테스탄트 6000여명이 노리치 지역에 많이 정착을 했는데, 그들은 1만 6000여명으로까지 불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런던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둘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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