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제 해보니.. 수업 흥미로워지고 자기 주도성 높아져"

이도경 2021. 12. 1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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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육 대전환 프로젝트 2021] ⑫ 화순 능주고의 변신
전남 화순 능주고 학생들이 회의실처럼 꾸며놓은 교실에서 ‘방탈출 게임’을 하고 있다. 이 게임은 노트북으로 세계사 퀴즈 20개를 푸는 것으로 놀이처럼 보이지만 수업의 일환이다.


고교학점제가 교원 단체 등으로부터 ‘시기상조’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확정되지 않은 대입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교원 충원 문제다. 고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입 정책의 앞날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학생의 수업 선택권을 보장해줄 교사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제도를 도입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전남 화순군의 능주고등학교 사례를 보면 이런 우려를 넘어서기 위한 길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능주고 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학점제가 안착 중인 측면도 있다. ‘특수한 사례여서 일반화 어렵다’ ‘교사 열정에만 의존해서는 지속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학교에서 시도되는 ‘수업 혁신’이 주목되는 이유는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변화’ 때문이다. 능주고 학생들의 수업 현장을 소개한다.

유쾌한 세계사 방탈출 게임

최근 능주고를 방문했을 때 기업 임원 회의실처럼 꾸며놓은 교실에서 고2 학생 10여명이 둘러앉아 ‘방탈출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각자 주어진 노트북으로 세계사 퀴즈 20개를 푸는 일이다. 1~10번은 기본 문항이고 나머지 10개는 함정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중간에 틀리면 첫 문제로 돌아간다. 마지막 문항을 맞히면 댓글창이 뜨고 댓글을 다는 순서로 순위가 정해진다. 상품은 1과 2등, 그리고 8, 10등에게 주어진다. 상위 순위에 들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토록 한 것이다.

오픈북 방식이어서 학생들은 교과서를 빠르게 뒤져 정답을 찾아내느라 바빴다. 교사들은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웃으며 바라봤다. 김명근군이 “2등”이라고 외치며 두 손을 들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김군은 “1등과 1분 차이, 아까 포츠담 회담만 맞혔어도”라며 아쉬워했다. 다른 학생들은 “나는 중간에 프로그램 오류가 났다” “아, 19번 때문에…”라고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놀이처럼 보이는 방탈출 게임은 정교하게 설계된 수업이다. 능주고는 학점제 선도학교로 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해당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대개 세계사에 흥미가 있거나 진로·진학에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학생들이다. 이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자기주도성을 갖고 수업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퀴즈 내용은 앞선 수업에서 이미 배운 것들이다. 억지로 들어온 학생이라면 성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퀴즈에도 재미를 느끼기 어렵고 암기의 고달픔만 남는다.

이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방탈출 게임과 상품을 걸었다. 오답을 적으면 첫 문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답을 적을 때 100% 확신이 필요하다. 아는 내용이어도 교과서 확인 작업을 유도하고 있다. 해당 퀴즈가 교과서 어떤 단원의 어떤 부분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빠르게 확인 가능하다. 학생들은 “오늘 퀴즈에서 푼 내용은 앞으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수업 유연화 주간

수학 수업도 독특했다. 교사가 교단에서 개념을 설명하고 문제를 풀어주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 수학 문제 하나를 정해놓고 학생 4명이 머리를 맞대 풀이 과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수업을 주도하고 교사는 돌아다니며 막히는 곳을 풀어주는 토론 촉진자 역할을 했다. 수학 문제를 기계적으로 풀기 위해서라면 비효율적인 방식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수리 논술에 대비할 수 있는 수업으로 보였다. 이런 수업이 가능한 이유도 앞선 세계사 수업처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들어온 학생이 다수라면 진행하기 어려웠을 수업이다. 이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학교와 교사들이 전용 공간을 마련해줬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수학 수업이 토론형은 아니다. 교사의 문제 풀이를 따라가는 통상적인 수업을 선호하는 학생을 위한 수업들도 개설하고 있다.

능주고는 대학 입시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방 소도시 학교임에도 서울대를 비롯한 학생·학부모 선호 대학에 상당수 진학시키고 있다. 올해는 역대 가장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능주고가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것에 대해 학교 측은 “다양한 양질의 수업도 있지만 무엇보다 ‘수업 유연화 주간’ 효과”라고 설명했다.


수업 유연화 주간에는 교사들이 과목의 벽을 허물고 융합 수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스포츠의 종목별 생체역학의 원리 탐구’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체육 세계사 생명과학 물리 교사들이 협업하는 방식이다. ‘한국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통시적 고찰과 문제점 그리고 미래 전망’이란 만만치 않은 주제에는 정치와 법, 경제, 한국지리 교사들이 달라붙어 학생들과 토론형 수업을 벌였다. 학교와 교사들이 개별 교과의 벽을 허물고 협력할 수 있어야 가능한 수업 방식이다. 올해 2학기 유연화 주관에 이뤄진 주제는 모두 24개였다(그래픽 참조). 이런 활동 덕분에 경쟁력 있고 차별화된 학생부가 가능해졌다고 학교 측은 설명한다.

송완근 능주고 교장은 “우리 학교는 정시 9, 수시 1 비중이었는데 학점제형 교육과정을 도입한 뒤 정시 7, 수시 3 비중이 됐다. 여전히 우리 학교는 정시가 유리하다”며 “그럼에도 교육자로서 수능보다 학점제가 방향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더 즐겁게 학교에 다니며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화순=글·사진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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