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적 노사관계 수준을 보여준 통상임금 소송[뉴스원샷]

김기찬 2021. 12. 1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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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노조 측이 16일 대법원 앞에서 통상임금 판결에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은 이날 노조 승소 취지로 판결했다. 연합뉴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의 촉 : 법 만능주의와 팽개쳐진 자율·자치


현대중공업 노사 간에 벌어진 통상임금 소송이 14일 노조의 의견을 대법원이 인용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소송의 쟁점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는가, 아닌가를 따진 게 아니었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조차 정기 상여금이 통상임금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진행된 소송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3대 요건을 갖춘 급여는 통상임금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성과에 따라 변동되는 성과급은 통상임금이 아니다. 현대중공업 소송에서 다뤄진 상여금은 대법원이 정의한 3대 요건을 모두 충족한다. 그러니 경영진도 이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판결이 나온 뒤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와 같은 경제단체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통상임금으로 계산하는 초과근로수당 등 각종 수당을 다시 계산해서 주는 게 합당하다.

그런데도 소송전까지 벌어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경영진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들고 나왔다. 비록 3대 요건에 해당하더라도 ▶노사가 합의해서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기로 하거나 ▶회사의 경영을 심각하게 저해할 위험이 있을 경우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을 내세웠다. 노사합의가 되면 분쟁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또 회사가 망하면 멀쩡한 기존 근로자의 일자리마저 잃게 되니 노사 모두에게 좋을 게 없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는 쪽으로 선택지를 둔 셈이다. 두 가지 모두 노사 간에 신뢰가 없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의칙이라고 한다.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 결과 그래픽 이미지.


현대중공업의 경우 이런 신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노사 합의는 없었다. 강성 노조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임금채권 소멸시효(3년)에 따라 수당을 새로 계산해 3년 치를 소급해서 지급하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건비가 지출된다. 경영상 큰 부담이다. 결국 회사는 소송 당시 선박 수주량이 급감하는 등 경영 사정이 악화한 점을 들어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임의로 제외했다. 여기에 노조가 발끈했다. 법원으로 무대가 옮겨졌다.

14일 대법원이 내린 판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근로자가 근로의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그 액수가 크다고 해도 회사가 망할 정도는 아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봤다.

이런 판결이 날 것으로 회사가 예측하지 못했을까. 앞서 지적했듯 정기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회사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한꺼번에 3년 치를 줘야 하니 경영상 발생하는 막대한 부담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소송을 끝까지 진행하며 시간을 번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임금체계 개편을 비롯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사실상 안일한 시간벌기 전략이 패착이었던 셈이다. 결국 로펌(법무법인)의 배만 불린 꼴이다.

기아차 노조원들이 지난해 8월 20일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기아차 노조원들이 정기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연합뉴스


2013년 통상임금에 대한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온 뒤 기업들은 여러 방법으로 대비해왔다. 판결에 따라 임금체계를 개편하거나 때로 노사 간에 끈질기게 대화하며 접점을 찾아갔다. 반면 제대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한 기업에서 통상임금 관련 소송으로 비화한다. 소송전만 벌어지면 경영진은 경영상 어려움을, 노조는 자기 몫만 따졌다.

경영진으로선 회사의 사정에는 아랑곳없는 노조가 원망스럽기도 할 법하다. 기업이나 경제단체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법원이 너무 좁게 해석한다"며 하소연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호소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법원의 판례 등을 종합해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경영진의 안이함 못지않게 노조의 이기주의도 심각하다는 점을 이번 소송이 보여줬다. 노조가 임금체계 개편에 나서지 않고 자기 몫만 챙기면 결국 대기업의 힘 있는 노조에 속한 근로자만 소득이 급격하게 올라간다. 대기업 정규직의 인건비 상승은 그보다 못한 비정규직을 비롯한 취약계층과의 격차를 더 벌리게 된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개선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챙기려는 이중성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노조가 자신의 몫을 청년의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등을 위해 양보하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을까. 그게 노사 자율과 노사 자치를 구현하는 길인데 말이다.

현대중공업의 이번 소송은 9년을 끌어 왔다. 노사가 접점을 찾을 시간이 그만큼 있었다는 얘기다. 다들 외면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뒤틀린 심사가 긴 시간을 허비하며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노조든 경영진이든 자율은 뒷전이고 법의 망태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걷어차고, 자치 능력도 없다는 점을 대내외에 공표한 꼴이다. 이런 노사관계를 가진 회사에 경쟁력을 바랄 수 있을까. 노사의 사회적 책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툭하면 법 해석을 두고 법원으로 달려가는 전형적인 후진형 한국 노사관계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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