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평창 안왔는데, 도리라고? IOC전문기자 조차 "왜?"[뉴스원샷]

전수진 입력 2021. 12. 19. 05:00 수정 2021. 12. 19.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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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은 남북관계 급진전의 물꼬를 텄습니다. 그 문은 다시 닫혔지만 말입니다. 사진은 2018년 2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평창 겨울올림픽도 벌써 4년 전의 일이 되어갑니다. 삼수 끝 유치에 성공했던 건 꼭 10년 전,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렸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였습니다. 고(故) 자크 로게 당시 위원장이 ‘평창(PYEONGCHANG)’이 적힌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현장에서 기사 송고 버튼을 누르던 제게 한 독일인 기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축하해. 이제 ‘평창’과 ‘평양’을 헷갈릴 일은 없겠네.” 약 2년에 걸쳐 평창 유치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IOC 위원들이 (악의는 없이) ‘평창’을 ‘평양’과 혼동하곤 했습니다.

이제 과거가 된 평창에 이어 2022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의 시간이 옵니다. 2008년 여름올림픽에 이어 14년만에 겨울올림픽까지 개최하는 기염을 통하는 건 중국의 무서운 성장세 덕에 가능할 겁니다. 겨울올림픽 개최지를 희망하는 정부가 적어지는 상황에선 IOC에게도 중국은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죠. 그러니 더더욱 미국과 그 동맹국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고 나서고, 그 사이에 한국 정부가 끼인 모양새는 참, 공교롭습니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함께 출전한 남북단일 여자하키팀을 응원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연합뉴스


그런데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습니다. 먼저 청와대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이 지난 1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서 한 발언입니다. 박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 수석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를 기억해보시면 굉장히 한반도 상황이 엄중하던 시기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그리고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그렇게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낸 모멘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도 (중략)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역내 평화의 올림픽이 되기를 저희는 바라고 있고 특히 직전의 올림픽을 개최했던 국가로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 수 있고 또 기여하는 그러한 어떤 도리와 의무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집권 10년을 자축하고 있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약 박 수석의 이 발언을 접했다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박 수석은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여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본인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극비리에 외교가 일각에서 평창 겨울올림픽을 매개로 삼아야 한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남측의 그러한 설득 노력에 김정은 위원장이 화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김 위원장이 그해 신년사에서 먼저 판을 움직였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평창 겨울올림픽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깜짝 발표를 했습니다. [조선중앙TV 캡처]


그해 1월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이랬습니다.
“남조선에서 머지 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는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우리는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다.”
남측에겐 깜짝 선물이었죠. 그전까진 전운(戰雲)이 감돌던 한반도 정세를 일거에 바꾼 김정은 위원장 특유의 한판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냈다”라고 표현한다면, 글쎄요.

둘째는 박 수석이 “직전의 올림픽을 개최했던 국가로서 (중략) 도리와 의무도 있다”고 발언한 부분입니다. 사실 평창 겨울올림픽은 외교에 있어서 크나큰 기회였습니다. 2018년 평창-2020년 도쿄-2022년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역사상 꽤나 드문 동북아 트라이앵글의 첫단추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난 7월 열린 도쿄 올림픽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을 놓고 옥신각신했던 모습은 “도리와 의무”와는 거리가 있었죠. 겨울과 여름 올림픽이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교와 올림픽을 국내 정치 수단으로 삼는 모습은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이징 올림픽에서 “도리와 의무”를 다하겠다고 하니, 궁금했습니다. IOC만 전문으로 기사를 쓰는 외신 기자들에게 e메일로 물었습니다. 캐나다인 기자인 R은 먼저 “도리와 의무라고? 왜?”라고 반문했습니다. 박 수석의 말을 전해주자 그는 이렇게만 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전 개최국이라는 이유로 보이콧에 참여하지 않다는 건 유효하지는 않은 이유인 것 같다. 결국 이번 보이콧을 둘러싼 모든 것은 다 정치적인 것이고, (‘도리와 의무’라는 말이) 듣기에 좋긴 하지만 그런 것을 규정하는 것은 없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2011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직후인 7월 초,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던 때. 유치 관련 중앙일보 1면을 선물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사진과 같은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IOC 관계자는 ″이렇게 미소 짓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고 귀띔했었다. 영면하시길. [중앙포토]


영국에서 IOC와 국제축구연맹(FIFA)을 30년 넘게 취재해온 키어 래드니지 기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스포츠라는 것은 중립적이어야 하는데도, 너무 많은 정치인들이 이를 자신의 잇속을 위해 악용해왔다. 사실 미국의 외교적 보이콧도, 영국과 호주 등의 합류 결정도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 개최국이라서 참여를 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해하긴 어렵다.”

외교 보이콧의 주역인 미국의 IOC 전문기자인 K는 익명을 전제로 “보이콧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라며 “보이콧을 보이콧하는 것도 의미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기자이지만 자국의 정책에 대해 이렇게 비판을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큰 강점이죠.

여튼, 종합하면 박 수석이 언급한 “도리와 의무”는 IOC 안팎에선 그다지 큰 점수를 못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직전 겨울올림픽 개최지인 소치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온 적도 없습니다. 유독 한국만 “도리와 의무”를 언급하는 건 아닐지, 그 이면의 정치적 의도와 계산만 눈에 선연할 따름입니다. 사실, IOC는 올림픽 개최 계약을 국가의 중앙정부가 아닌 해당 개최도시와 체결합니다. 따라서 만약 역할을 할 게 있다면, 그건 한국 정부가 아니라 평창 군이 되는 셈이죠.

무엇보다, 올림픽의 주인공은 피땀흘려 훈련 중인 선수들입니다. 그점은 미국도 중국도 한국도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전수진 투데이ㆍ피플 뉴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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