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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필요"..한국일본학회 창립 '주역' 고 이영구 박사 논문집 출간

윤희일 선임기자 입력 2021. 12. 28. 12:46 수정 2021. 12. 2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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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송 이영구 박사. 한국일본학회 제공


광복 후 대한민국의 민족적 구심점 중 하나는 ‘반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1965년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별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의 이웃 나라라는 것 역시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좋거나 싫거나 우리는 일본과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일본과 교류를 하려면 우리는 일본을 알아야만 했지만 우리에게는 일본을 알기 위한 터전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도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한 학자와 전문가들의 연구서와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

당시 일본을 다녀온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중 한 명이 고 서송(瑞松) 이영구 박사(사진·1931년 11월16일~2020년 2월3일)였다. 그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일본 도쿄(東京)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결심을 했다.

‘그래, 우리가 일본을 제대로 알려면 일본을 연구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을 연구하는 학회가 필요하고….’

이 박사는 일본에 관한 객관적 연구가 사실상 두절돼 있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관련 학회를 설립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일본 연구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학문적 장’이 필요하다”고 외치면서 뜻이 맞는 학자들과 힘을 모아 1973년 2월 ‘한국일본학회’를 창립했다. 당시 학회 창립에 참여한 학자는 15명 정도였는데, 이 학회는 그후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일본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면서 현재는 1000명이 넘는 회원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회로 성장했다.

한국일본학회 인터넷 홈페이지. 홈페이지 캡처


한국일본학회 관계자는 “한국 최초, 한국 최대 규모의 일본 연구 학회가 고 이영구 박사님 등의 열정과 노력으로 설립된 것”이라면서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여러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학회 초창기에 14년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사실상 한국일본학회를 이끌어왔다. 한국 내 일본 연구의 선구자로 지칭되는 이 박사에 대해 부경대 최건식 교수는 “한국일본학회에 있어서 이영구 박사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지난 2004년 사재 1억원의 기금으로 한·일 양국의 연구 및 문화교류에 공헌한 연구자 및 단체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서송한일학술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 양국을 진지하게 연구해 온 학자와 단체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출간된 고 이영구 박사의 논문집 <하이데거(Heidegger)의 예술철학에서 바쇼(芭蕉)의 하이쿠(俳句)문학으로>의 표지. 한국일본학회 제공


한국일본학회의 설립을 주도한 이 박사의 연구가 2023년 한국일본학회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최근 조명을 받고 있다. 서울대·군산교육대·한남대 등을 거쳐 중앙대(일본어학과)에 재직하다 퇴직한 이 박사의 논문을 하나로 모은 논문집 <하이데거(Heidegger)의 예술철학에서 바쇼(芭蕉)의 하이쿠(俳句)문학으로>(도서출판 BG북갤러리)가 최근 이 박사의 후학 등에 의해 출간됐다. 여기에는 이 박사가 평생 쓴 논문 35편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이 박사는 원래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러다가 1967년 일본의 하이쿠(俳句, 일본 고유의 정형시) 시인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문학을 접하면서 연구 영역을 일본 문학 쪽으로 넓혀갔다. 그는 바쇼의 하이쿠 이론서 안에서 하이데거 시론과의 공통점을 발견한 뒤 1970년 도쿄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연구대상을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 그중에서도 ‘시가문학’으로 전환했다.

이 박사의 논문집에는 근대 서양의 지성과 근세 동양의 감성을 학자 입장에서 수용하면서 이를 재해석한 논문, 일본 문학의 연구 방법과 방향에 관한 논문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이 수록됐다. 논문집 편찬을 이끈 한 학자는 “광복 이후 한국의 일본학 연구자 1세대가 가졌던 고민과 그 역할 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에 관한 연구를 일본이라는 특수국가, 특수지역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와의 관련 아래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일본적인 것을 찾아냈을 때 그 특수성을 다른 특수성 또는 보편성과의 대비를 통해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박사가 자신의 글에 남긴 이 말은 일본 관련 연구자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윤희일 선임기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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