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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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자상한, 너무 자상한 한국씨

이현상 입력 2022. 01. 14. 00:34 수정 2022. 01. 14.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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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가 키운 '유모 국가'
"다 널 위해"라며 기본권 희생 요구
너무나 당당함에 시민은 질린다
13일 오후 서울의 한 백화점 입구에서 시민들이 접종 증명을 통해 입장하고 있다. 법원은 방역패스(백신접종증명·음성확인제) 정책 집행정지 신청의 결정을 앞두고 있다. [연합뉴스]

감기만 하면 자연스레 염색 효과를 낸다는 샴푸가 시빗거리가 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염색을 꺼리는 소비자 사이에서 '완판 사태'까지 났던 제품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 제품에 든 'THB'라는 성분이 알레르기를 낳을 수 있다며 사용 금지를 예고했다. 개발업체는 "극소량의 사용은 문제될 게 없다"며 반발했다. 문제의 성분은 유럽연합(EU)에선 규제 리스트에 올랐지만, 미국·일본에선 아니라고 한다. 식약처의 개입이 '국민 건강을 걱정하는 국가의 당연한 의무'일지, '혁신을 가로막는 오지랖 넓은 간섭'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기사 댓글로 본 소비자 반응도 엇갈린다. 확실한 것은 국가의 관심 대상에는 내 두피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유모 국가(乳母國家·Nanny State). 복지국가가 커지면서 따라붙는 별명이다. 복지를 구실로 국가가 국민 사생활이나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현상을 말한다. 코로나19 사태는 대한민국을 더욱 '자상한' 국가로 만들었다. 필요 없다는 사람들 지갑에까지 굳이 재난지원금을 꽂아 줬다. 긴가민가한 사람들까지 PCR 검사를 받게 하고, 증상이 있든 없든 입원·입소시키기도 했다. 이런 자상함에 감동하던 사람들이 슬슬 고개를 젓기 시작한다. 아낌없이 내주던 국가도 힘 달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나랏빚이 치솟고, 의료 부담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 근본적 질문은 따로 있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전체를 위해 개인의 권리가 희생돼야 하는가.

방역패스 갈등은 이런 질문이 응축된 문제다. 특히 소아·청소년 방역패스는 심각하다. 정부는 "방역패스의 목적이 또래 미접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상한 마음씨는 고맙지만, 과학적 데이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19세 미만의 코로나 누적 치명률은 0에 수렴한다. 코로나에 감염된 어린이가 위중증으로 발전할 확률은 성인의 100분의 1 수준이다. 소아·청소년 접종 목적이 "어른들의 안전"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솔직하지 않은가.

청소년 접종 강요는 심리학적 측면도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감염을 '어쩔 수 없는 위험'으로 여기지만, 접종 부작용은 '선택에 따른 위험'으로 생각하기 쉽다. 인간은 전자보다 후자에 훨씬 민감하다. 많은 사람이 자동차 사고보다는 비행기 사고에 더 불안해한다. 자동차 이용은 어쩔 수 없지만, 비행기는 안 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이라는 통계(2003년 미시간대 연구팀)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소용없다. 탑승 강요로 여길 뿐이다. 부모의 결정으로 주사를 맞혔는데, 그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부모 입장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다. 국가가 "내가 더 잘 알아" 하며 강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설득이 우선이다.

자상한 얼굴에 감춰진 국가의 억압 본능을 시민들이 이제 눈치채기 시작했다. 정부로선 억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과보호를 스스로 인정하는 부모는 없다. 정부의 알뜰살뜰 보호가 꼭 선의만은 아닐 거라는 의구심도 크다. 보수 집회엔 '살인자'란 딱지를 붙이더니 노동계 집회는 어물쩍 넘어가는 데서 국가의 이중성이 읽혔다. 국가는 기본권 유보를 요구하면서 외친다. "다 여러분을 위해서."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시민들은 방역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느낀다.

코로나19가 유모 국가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지만 대선판의 '모성(母性)' 경쟁은 오히려 더해 간다. 탈모·임플란트 건강보험, 병사 월급 200만원, 출산 부모 월 100만원 지급 등 깨알 같은 소확행과 심쿵 공약들로 넘쳐난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길 없는 국민이 이제 국가의 흰머리를 걱정할 판이다.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어떡하나, 염색 번거로움을 덜어준다는 샴푸도 이제 못 쓸지 모르는데.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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