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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실미도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

입력 2022. 01. 14. 00:39 수정 2022. 01. 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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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과 여성] ⑦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上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최용락 기자]
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여 간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네 번째 주인공은 영화 <실미도>로 잘 알려진, 실미도사건의 유족 임충빈 씨입니다. 충빈 씨의 오빠 임성빈 씨는 1968년 어느 날 밤, 집에 가던 길에 납치돼 실미도부대원이 됐습니다. 충빈 씨와 가족들은 2004년 영화가 흥행하기까지 임성빈 씨의 행방을 몰랐습니다. 1971년 실미도부대원들이 사살명령을 피해 탈출한 8·23 사건, 살아남은 임성빈 씨가 1972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에도 말입니다.

오빠를 빼앗아간 국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2021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유해도 못 찾았습니다. 충빈 씨 형제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오빠의 유해를 찾고 억울하게 빼앗긴 오빠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요.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임충빈 실미도유족회 공동대표. 실미도부대원 고(故) 임성빈 씨의 동생이다. ⓒ프레시안(최형락)

11살 무렵 사라진 오빠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여덟 남매 중 넷째인 임충빈은, 장남이자 장손인 오빠와 12살 차이가 났다. 임충빈의 기억 속 오빠는 덩치가 크고 듬직했다. 또 다정하고 성실했다. 추운 겨울엔 새벽에 멀리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땔감을 넣어 방을 따뜻하게 해줬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아들이 있는 임충빈 네를 부러워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빠를 보고 많이 웃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오빠. 책임감도 강해 20살이 넘어서는 집안을 위해 도시에 나가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섰다.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어머니가 막내를 낳았을 때였다. 오빠는 집에 와 임충빈과 언니들에게 옷 사 입으라며 용돈을 쥐어줬다. 어머니 몸조리 잘 하시라고 신신당부하며 땔감을 가득 쌓아 두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증발했다'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오빠가 사라진 후 임충빈의 집엔 검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농사는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오빠를 찾으러 경찰서란 경찰서는 다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청와대에 편지까지 썼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적을 알 수 없다"는 답신이 왔었다.

어머니는 머리에 흰 띠를 누르고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이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게 그땐 더 당연했다. 어머니는 매일 니신(진통제)을 마셨다. 어린 자녀들 앞에서 안 울려고 했지만 임충빈은 깊은 밤 가슴을 치며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까지 도맡았다. 위에 두 언니가 일찍 결혼해 출가하고 넷째 임충빈이 장녀 노릇을 하며 어머니 곁을 지켰다.

"엄마 아프시던 게 가장 기억나요. 매일 울고. 부모님 사이도 나빠졌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어요. 자식 못 챙겼다고. 속이 썩어 문드러졌는지 엄마가 평생 아프셨어요.

엄마는 매일 새벽마다 물 떠놓고 기도하고 매 끼니마다 오빠 밥을 차려놨어요. 대문도 열어놓고 한 번도 잠그지 않았어요. 유명하다는 점쟁이 찾아다녔죠. 무당 불러다 굿도 자주 했고요.

엄마가 평생 아프셨어요. 평생 이 병, 저 병 앓다가 나이 70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2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두 분 모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생각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호주머니에서 아주 꼬깃해진 오빠 증명사진을 꺼내서 쥐어주셨어요. 오빠 꼭 찾으라고."

임충빈은 그때로부터 36년이 지난 2004년에야 오빠의 행방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오빠를 찾으러 다니고 어머니가 아프던 그때, 오빠는 실미도에 있었다.

영화관에서 알게된 오빠의 이야기

실미도는 인천 중구 무의도 앞의 작은 섬이다. 영화 <실미도>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곳이다. '실미도부대'라 불리는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는 1968년 김신조 사건(1·21사태) 후,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만들어진 비밀 특수부대다. 부대원은 북에서 내려온 것과 똑같이 31명이었다. 임충빈의 오빠 임성빈은 그중 한명이었다.

▲영화 실미도 포스터.

"영화에서는 실미도 부대원들이 교도소에 있던 사형수, 특수범죄자였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그렇게 만들어진 비밀 특수부대도 있었지만 실미도부대는 민간인을 납치해 만든 부대였어요. 저희 오빠도 마찬가지고요.

나중에 보고서 나온 걸 보니까, 대전에서 행상하던 오빠를 어느 날 밤에 길에서 납치했대요. 저희 오빠가 체격이 좋고 당수(가라테) 5단이었거든요. 눈여겨보던 거죠."

그렇게 모집한 31명에게 국가는 약속했다. 3~6개월가량 훈련한 뒤 김일성 사살 작전에 성공하면 미군부대에 취직시켜준다, 소위로 임관시켜준다, 집을 주겠다 등등. 훈련기간 동안 월급으로 15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1만550원이었으니, 보통 사람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월급은 첫 3개월간 3200원씩 지급된 후 끊겼다. 그 돈조차 기간병들에게 빼앗겼다. 주·부식도 점점 부실해져 나중엔 개밥이나 돼지 먹이를 몰래 훔쳐 먹었다. 휴가나 외출은 당연히 없었고 서신 왕래도 금지였다.

길어야 6개월이라던 훈련기간은 3년을 훌쩍 넘겼다. 가혹행위도 심했다. 폭행은 일상이었고 훈련 성적이 저조한 동료 부대원을 다른 부대원들이 직접 폭행하게 했다. 훈련 중 교관의 총에 맞는가 하면 완전 군장을 한 채 바다에 뛰어들게 했다. 3년4개월의 훈련기간 동안 7명의 부대원이 죽었다.

실미도사건 : 죽고싶지 않아 탈출하다 

이후는 영화와 거의 같다. 국제정세가 뒤바뀌며 작전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실미도부대원들은 물론 기간병들의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국가가 그들을 버렸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가혹행위는 점점 심해졌고 이에 맞선 하극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실미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 같았다.

분노와 폭력에 절여진 이들이었다. 언제까지 섬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러다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이들을 극한으로 몰아갔다. 탈출을 시도하는 부대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몇몇 부대원은 인근 섬으로 탈출했다.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고는, 마을 주민들을 인질로 잡아 대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러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1970년대 초 남북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임무가 완전히 취소됐다. 국가에게 이들은 더 필요치 않았다. 되레 이들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된다며 사살명령을 내렸다.

그 사실을 알게된 실미도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실미도부대원 24명 중 20명이 죽었다.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실미도부대원 4명, 임충빈의 오빠 임성빈과 김병염·김창구·이서천 등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후에 진화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처음 생포된 건 5명이었다. 5명이 살아있었단 것이다. 한 명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네 명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2년 3월 10일 총살형이 집행됐다.

모든 건 철저히 비밀로 이루어졌다. 유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임충빈은 그 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였어요. 3월 어느 날에 엄마가 유독 심하게 아프셨어요. 이러다 돌아가시는 것 아닌지 밤새 걱정했어요.

그때 키우던 개가 밤새 울었어요. 무서웠죠. 개가 밤새 울면 누가 죽는다고 했거든요. 개는 천 리를 본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마당에 고양이가 죽어있더라고요. 무섭고 끔찍한 날이었어요. 나중에 조사보고서에 사형 집행된 날짜를 보고 그날이 생각났어요. 그때 오빠가 죽은 것 아닐까요."

지울 수 없는 그림자, 그리고 부모님과의 약속

오빠가 사라지고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임충빈은 오빠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빠와 함께 산 세월보다 그리워한 세월이 더 길었다. 기억 속 오빠를 닮은 뒷모습을 보면 쫓아가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천안에서 동생과 자취하던 때, 잠든 임충빈의 귀에 밖에서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더랬다. 잠이 달아난 임충빈의 심장이 쿵쿵댔다. 혹시 오빠가 아닐까 싶었다.

사라진 오빠의 행적은 2004년에야 알게 됐다. 11살 어린이 임충빈이 40대 중반의 주부가 됐을 때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달성한 <실미도>가 개봉했을 때였다.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각종 미디어에서 실미도사건을 다뤘다. 실미도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지만 임충빈은 오빠가 실미도와 연관됐을 생각은커녕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그때 여기저기서 다 실미도 얘기를 했거든요. 어느 날 작은아버지가 무슨 방송을 보고는, 청주에 있던 일빈언니에게 전화를 했어요. 혹시 오빠가 실미도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 있지 않겠냐고요. 수십 년 동안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거죠.

언니도 그랬어요. 혹시나 단서라도 찾을까 하는 마음에 소대장이었다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어요. 오빠 증명사진을 보여주자마자 그 사람이 눈이 커지고 말을 못 했대요, 그러다 무슨 단체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라고 가리켰는데, 언니가 아주 까무라쳤대요. 그날이 또 아버지 제삿날이었어요."

소대장이 보여준 사진은 실미도부대원들의 단체사진이었다. 오빠 임성빈은 맨 뒷줄에,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었다. 덩치 좋은 오빠는 해골같이 마른 모습이었다.

▲ 임충빈 실미도유족회 공동대표. 실미도부대원이었던 고(故) 임성빈 씨의 동생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언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임충빈은 충격에 온몸이 떨렸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남편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혼자 갈 엄두가 안 나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보는 내내 그 심정을 정말 뭐라 말할 수가 없어요.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막 두근거렸어요. 온몸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쏟아졌어요. 주변 사람들이 막 쳐다보는 데도 주체할 수가 없더라고요. 친구도 놀라서 계속 '왜 그러냐'고 묻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소리치며 울고 싶었어요.

평생을 그리워했는데. 오빠가 저기 있었구나, 저렇게 있었구나. 오빠가 너무 불쌍하고. 영화를 본 순간 다짐했어요. 꼭 오빠 명예회복해야겠다고요. 살인자, 특수범죄자 아니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나라가 우리 오빠를 뺏어간 거라고요."

어떻게 된 건지 알려달라고 한 것 뿐인데

일곱 형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지난 세월의 서러움이 북받쳤다. 심장이 두근거려 한동안 잠도 못 이뤘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평생 기다렸는데. 평생 울고 아팠는데. 오빠 어디 있는지만 알려줬어도, 사형당한 거라도 알려줬으면 더 안 기다리지 않으셨을까요. 덜 아프지 않았을까요. 편지 한 통 못 보내게 하고.

박정희도 오빠의 행방을 알아봤지만 모른다고 했어요. 근데 오빠 사라지고 몇 번 입대 영장이 나왔거든요. 군대 안 가면 잡아가잖아요. 그런 것도 없고 한 번 누가 찾아와서 행방불명된 거 확인한 게 다예요.

사형집행한 것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나라가 우리를 그렇게 철저히 기만했어요. 그 모든 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영화 <실미도>가 그렇게 반향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충격을 받은 임충빈과 그 형제들이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에도 국가는 침묵했다. 형제들이 수차례 민원을 넣어서야 간신히 오빠의 재판기록 등을 받을 수 있엇다. 마치 조각난 파편을 하나씩 모으는 것처럼, 사건의 진실을 알아갔다.

깜깜한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국가는 자기가 한 일을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1968년 사라진 오빠가 다음 해인 1969년 사망신고가 됐다는 것도 2004년 제적등본을 떼어 보고야 알았다. 신고한 사람은 아버지로 돼 있었지만 도장은 아버지 것이 아니었다.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최용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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