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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창] 윤석열이라는 '텅 빈 기표'

구혜영 정치에디터 입력 2022. 01. 14. 03:01 수정 2022. 01. 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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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전기요금 관련 공약을 발표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텅 빈 기표’를 대선 정국에 인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어떤 자리에 놓아도 아무 의미 없이 해석되는 바로 그 ‘텅 빈 기표’.

구혜영 정치에디터

이번 대선은 정치라는 ‘텅 빈 기표’를 드러냈다. 한 시대는 성공과 실패의 총합으로 만들어진다. 정치는 이 명제가 적나라한 분야이다. 선거가 특히 그렇다. ‘져도 이긴 선거’라는 평가가 있듯 반드시 성공의 기억만 각인되지 않는다. 실제 패자가 더 주목받는 경우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버니 샌더스를 들 수 있다. 비록 낙선했지만 각각 1995년 부산시장·2000년 총선(부산 북강서을)을 ‘지역주의 균열’, 2016년 미국 민주당 경선을 ‘민주적 사회주의’로 뒤흔들었다. 거대한 저류가 어디를 향하는지 정치가 포착했던 시대였다. 2022년은 어떤 성공과 어떤 실패가 빚어낸 시대로 기억될까. 성공은 고사하고 ‘이런 대선은 없었다’는 말만 떠다닌다. 거대 정당 후보들이 뭘 “하겠다”고 약속할수록 불신만 커지는,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다. 시대정신마저 고작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이라니.

다음으로 보수라는 ‘텅 빈 기표’가 확인됐다. 유난히 보수를 주목하게 되는 대선이다. 국민의힘을 보면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이 대선 후보다. 민주당 출신 거물급 정치인이 대선 지도부 역할을 맡았다. 무엇보다 촛불의 성과를 지난 5년간 보수가 어떻게 가로막았는지 평가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국민의힘과 윤석열 대선 후보가 보내는 신호는 위험하다. 여성가족부 폐지, 멸공 챌린지, 주사파 발언에서 보듯 대선 이후 사회를 반동기로 몰고 가려 한다. 보수의 재구성도 반페미, 종북 이슈를 중심으로 한 우파 재결집에 가깝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두 자릿수 지지율은 국민의힘이 극우화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징후다. 김성식 전 의원은 “밀린 숙제를 안 한 후과”라고 말했다. 실제 국민의힘은 탄핵 이후 혁신이라는 숙제를 덮어둔 채 정권교체라는 급행열차에 그냥 올라탔다. 이런 본질을 외면한 채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의 봉합을 위안 삼는 보수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후보 단일화? 정권교체 여론을 쇄신과 결합하지 않고 진행되는 후보 단일화는 내홍의 가장 극적인 판이 될 게 뻔하다.

그다음은,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이 처음으로 ‘텅 빈 기표’가 된 대선이다. 김종인이란 상품은 선거나 여야 위기 국면에서 상종가였다. 중도를 무기로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력은 여야 주류의 힘을 빼는 쪽으로 발휘됐다.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넣고 당헌당규에서 보수라는 말을 삭제하려 했고, 2016년 총선에서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 당 최대주주들을 컷오프했다. 그러나 대선 레이스에서 벌어진 국민의힘 내홍에선 통하지 않았다. 몇몇 요인이 있다. 첫째, 대선 구도가 ‘김종인’이란 상품의 효용 가치를 없앴다. 김 전 위원장이 “내가 곧 중도”라 선언해도 비호감 대선이라 유권자들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둘째, 김 전 위원장에게 권한을 위임할 리더가 부재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문재인 대통령 등 그간 김 전 위원장이 선택한 ‘주군’들은 리더십은 부족했지만 세력을 대표했다. 이들이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김 전 위원장이 다소 무리하게 통제해도 지지자들은 용인했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 리더십 정도로는 김 전 위원장에게 권한을 부여하기 어렵다.

정치와 보수와 김종인이라는 ‘텅 빈 기표’의 총합은 윤석열 후보로 귀결된다. 타협과 조정의 예술, 때론 악마와도 손잡아야 하는 정치를 상명하복이 몸에 밴 검찰 출신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윤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까지 오른 것은 양측 특성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극우화가 대표적이다. 극우화를 거칠게 표현하면 ‘힘센놈 따라잡기’다. 힘이 있는데 누군가를 배려하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다. 극우화 징조인 혐오만 해도 거추장스러운 걸 힘으로 없애는 방법 아닌가. 여가부 해체는 그래서 정책적 ‘텅 빈 기표’이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텅 빈 기표’가 쏟아질지 모르겠다. 검찰 출신 후보가 극우화하는 보수정당에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 2022년 대선의 지배적인 기억이 될 것 같다.

다만 마키아벨리의 용병론이 국민의힘에 뒤늦은 각성제가 되길 바란다. “어떤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용병의 토대 위에 세운다면 그의 자리는 안정되지도, 안전하지도 못할 것이다.” 반대로 김승립의 시가 윤 후보의 성찰을 돕는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상의 쓸쓸한 벽마다 네(주권자) 인생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는 대못으로 박혀 있고자 했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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