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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유려함, 그 어려움에 대하여

입력 2022. 01. 14.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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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혜(시인·웹툰작가)


창작 분야에서 활동하면 타인의 재능에 압도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살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실력에 절로 마음의 고개가 조아려졌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고등학교 교실로 돌아간다.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애는 미술학원 문턱조차 밟은 적이 없었다는데 소묘면 소묘, 판화면 판화, 수채화면 수채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각을 드러냈다. 미술 선생님은 늘 그 애의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달리했다.

나도 그림을 곧잘 그리는 아이였지만 어린 내 눈에도 그 친구는 뭔가 달랐다. 내가 조금 소질이 있는 정도라면 그 애는 재능이 줄줄 흘러넘쳤다. 우리는 같은 만화 동아리에 소속돼 있었고 모여서 그림을 그릴 일이 많았다. 나는 늘 그 애의 유려한 선이 부러웠다. 내가 그은 선에는 어설픔과 주저함과 자신 없음이 묻어나 있었는데 그 애의 선은 늘 기세 좋고 당당하고 여유 있었다. 내 눈에 친구는 늘 쉽게 쉽게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모든 선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는 듯 천연했고 편안했다. 쓱쓱 그리는 데도 작품이 됐다. ‘그림이 저렇게 쉽나? 타고난 천재니까 그럴 수밖에.’ 나는 이렇게 읊조리며 천재가 아닌 나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자율학습 시간에 그 애의 수학 문제집을 빌린 적이 있다. 모든 학생이 정석적으로 들고 다니던 두툼한 책이었는데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공식과 공식 사이, 그래프와 그래프 사이가 새까맸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 봐도 친구가 그려둔 그림들이 빼곡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사람 손은 그리기 어려워’ 할 때 그 애는 천 개의 손을 그려보고 있었다. 내가 ‘내 선은 거칠어’라고 푸념할 때 그 애는 만 개의 선을 그어보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천재가 아니라 노력파였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애는 아무리 돌아봐도 재능이 남달랐다. 당시 어린 나를 압도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지치지 않고 그린다는 것 역시 엄청난 재능이다.’ 가진 재주도 탁월한데 그를 사랑하고 갈고 닦기까지 한다니 그를 어찌 넘어설 수 있으랴. 또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타인의 능숙함은 그가 그 행위를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구나. 누구나 그 애의 그림을 보고 “대충 그려도 작품이네”라고 말했지만 그 애는 그 매끈한 터치를 위해 책이 시커메지도록 선에 매달려온 것이다.

직장인이 되고 광고 카피를 쓰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수많은 헤드라인, 보디카피, 브로슈어 문구를 썼지만 제일 어려운 건 늘 기업 슬로건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브랜드의 정수를 담은 짤막한 문구를 쓴다는 것은 몇 날 며칠에서 몇 달은 족히 걸리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잘 쓴 슬로건일수록 쉽게 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브랜드와 너무 잘 어울려서, 핵심을 정확히 담고 있어서 마치 그 문구의 자리는 원래 그 자리였던 듯 편안해 보였다. 문외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마니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슬로건, 바로 그런 슬로건이 좋은 슬로건이었다. 그 이면에 카피라이터가 지새운 수많은 밤과 구겨버린 종이가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유려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글이나 말, 곡선 따위가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답다’이다. 친구의 그림이나 좋은 슬로건을 떠올리면 ‘유려하다’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당당하고 매끈해서 주저함이란 없어 보이고 심지어 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생각한다. 친구는 혹은 좋은 슬로건의 주인은 오늘의 유려함을 위해 자신 없고, 거칠고, 못난 나를 얼마나 감당했을까. 비단 창작 분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가사든 수술이든 타일 시공이든 강의든 어떤 분야의 능숙함은 늘 당사자가 그것을 ‘쉽게 쉽게’ 하는 듯 보이게 한다. 하지만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저 유려함을 획득하기 위해 저마다 까맣게 채웠을 두툼한 책을. 까맣게 새웠을 수많은 밤을.

홍인혜(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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