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머릿속에서나 존재할 뿐 일상생활 속에서 결코 볼 수 없을 것 같은 거액이 있다. 1경(京)원이 그렇다. 1조원보다 1만배나 큰 액수다. 0의 개수만 16개나 된다. 1조원이야 세계적인 부자의 기준(억만장자)이니 알 수 있지만 1경원은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월급쟁이가 평생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이 많아야 수십억원이니 당연하다. 시야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올해 예산 608조원, 지난해 가계부채 1806조원, 지난해 국내총생산(GDP·국제통화기금 기준) 1조8239억달러(약 2163조8750억원)도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국내 통계로는 2020년 말 기준 1경7700조원인 국민순자산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접해본 가장 큰 액수는 535조달러(약 63경4670조원)다. 2017년 각국의 기후과학자들이 2100년까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대기 중 이산화탄소(CO2) 1조t을 포집·저장하는 데 들 것으로 추산한 비용이다. 그해 세계은행이 추산한 전 세계 국가의 GDP 합계인 80조9348억달러(약 9경6130조원)의 6배가 훨씬 넘는 액수다.
상상 속의 1경원이 현실 속으로 들어왔다. 14일 발표된 LG에너지솔루션 기업공개(IPO) 결과 국내외 기관투자가의 최종 수요예측 경쟁률은 2023 대 1이었다. 이는 기관투자가들이 이 회사 주식청약을 위해 쏟아부을 의향이 있는 돈이 공모금액 10조~12조원대의 2023배에 이른다는 의미다. 전체 주문 규모는 1경5203조원이다. 경 단위 주문 규모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돈이면 지난해 6월 시가총액 기준으로 2692조원인 코스피·코스닥·코스넥 등록 기업 모두를 사고도 남는다.
물론 현실적으로 기관투자가들이 실제로 납부할 청약증거금은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GDP의 6.5배나 되는 돈이 몰려든 것은 놀랍다. 단군 이래 최대 IPO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맞게 이 회사 주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지만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이 그만큼 많은 현실도 보여준다. 일반 투자자의 증권계좌에는 132조원이라는 돈이 대기 중이라고 한다. 상상 속의 숫자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다만 돈이 된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다.
조찬제 논설위원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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