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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지역 화폐,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김신영 기자 입력 2022. 01. 15. 03:20 수정 2022. 01. 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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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자체가 뛰어들어 30조 '공룡'이 된 지역 화폐
낙후지역 돕자는 취지 변질, 부자 지역이 더 혜택받아
'그 돈 어디서 나오나' 누군가는 물어야 할 때
낙후된 지역 경제를 되살린다는 취지의 지역 화폐의 올해 발행 예상액이 당초 계획의 5배인 30조원으로 불어났다. 지역 화폐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기지사 시절 대표적인 공적으로 내세우는 정책이다. 사진은 지난 2019년 경기지역화폐 체험 행사에 참여한 이재명 후보(당시 경기지사, 오른쪽)와 연예인 김민교씨의 모습. /경기도

지역 화폐에 빠진 직장인이 주변에 많다. 현금과 다름없는 지역 화폐를 10% 할인된 가격으로 휴대폰 앱에 충전해서 사용한다. 예컨대 10만원어치 지역 화폐를 사려면 9만원만 낸다. 1만원은 세금으로 정부가 대준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 정도에서만 안 쓰면 된다.

합리적 소비를 할 뿐이니 사용자를 탓할 일은 아니다. 합리성의 테두리 밖으로 나간 건 정치권과 정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정치적 계산이 경제적 판단을 베어버릴 때 결과는 처참하다”고 했다. 한국의 지역 화폐는 ‘돈 선거’에 취한 정치판이 경제 논리를 베는 위험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역 화폐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3000억원어치 발행됐다. 코로나 이후 발행액이 일시적으로 약 20조까지 늘어났는데 정부는 올해 이를 6조원으로 줄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열린 지난해 말 국회에서 발행액이 15조, 25조로 슬슬 늘어나더니 결국 30조원으로 결론이 났다. 지역 화폐 발행액이 서울시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공룡’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때는 소소하고 실험적이었던 지역 화폐를 주류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지방자치단체 재정을 들여 지역 화폐를 활성화한 일을 그는 지금도 큰 공적으로 내세운다.

지역 화폐의 당초 취지는 낙후한 지역 상권을 돕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성격이 변질했다. 코로나 부양책 중 하나라며 중앙정부의 지역 화폐 지원금을 대폭 늘렸다. ‘낙후’와는 거리가 먼 서울시까지 지원금을 대줬다. 정부 예산을 받기 위해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다 보니 결국 모든 지자체가 지역 화폐를 발행하는 지경이 됐다.

여당은 지역 화폐를 늘린 대신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양보했다고 주장한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더 큰 피해를 본 소상공인 등에게 선별적 지원을 하는 것이 옳다는 국민적 공감대 아래 보류됐다. 그렇다면 지역 화폐는 합리적으로 분배되나. 분석해 보니 주먹구구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서울시 지역 화폐는 80% 이상을 30·40대가 쓴다.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60세 이상의 사용 비율은 4%에 불과하다. 지역 화폐를 쓰기 편한 스마트폰 앱에 어르신들이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IT 기기를 잘 다룰수록 지원금을 많이 받아 가는 실상을 납득하긴 어렵다.

정부는 소상공인에게 피해 보상금을 줄 때 코로나 전에 비해 매출이 줄었음을 까다롭게 증명하도록 한다. 지역 화폐는 다르다. 기준 없이 뿌려진다. 예컨대 지역 화폐는 많은 골프장에서 사용이 가능한데, 골프를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까지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금을 꽂아주는 것이 타당할까. 논의조차 없다.

지역 화폐가 빠르게 불어나기 시작한 2020년 말에 송경호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역 화폐의 소비 진작 효과가 미미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얼빠졌다”고 몰아세웠다. 이 보고서가 오래된 데이터를 썼다는 것이 비난 요지였다.

송 위원은 지난해 말 최신 데이터를 업데이트해 보고서를 새로 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가 밝혀졌다. 지역 화폐는 중앙정부가 지자체가 쓰겠다는 예산에 맞추는 방식이어서 풍족한 지자체일수록 정부 지원금을 더 많이 타 간다는(발행액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컨대 서울에서 지역 화폐로 받은 돈이 가장 많은 지역은 대표적 ‘부자 동네’ 강남구였다. 가맹점당 평균 450만원을 받았다. 중구(118만원)의 4배 수준이다. 송 위원은 “어려운 지역을 돕자고 시작한 지역 화폐의 취지와 모순되는 결과”라고 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송경호 부연구위원, 서울시의회

중앙정부가 주도해 지역 화폐를 운영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분배 원리가 모호하고 운영사 선정을 둘러싼 잡음 등 부수적 부작용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부겸 총리조차도 국회에서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혜택이 크게 가는 역진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비효율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가 나왔음에도 여당은 ‘30조 지역 화폐’를 밀어붙였다. 대선에만 혈안이 된 야당도 질세라 동조했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한번 도입된 정부 지원금을 줄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이를 ‘현상 유지의 폭정’이라고 표현했다. 나쁜 정책을 수술하기보단 돈을 뿌려서라도 눈앞의 ‘한 표’를 손에 넣고자 하는 정치의 속성이 나라를 서서히 병들게 한다고 했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그래도 연방 재정을 투입해 지역 경제를 살린다면 좋다고 생각한다”는 학생의 주장에 이렇게 되묻는다. “지역을 고르는 기준은? 그리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오지?” 지역 화폐에 대해 누군가는 물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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