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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남은 사람들의 절규 "사형하고 암매장..어디 묻었는지도 말 안해요"

입력 2022. 01. 1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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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과 여성] ⑧ 실미도사건 유가족 임충빈 下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최용락 기자]
<실미도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 에서 이어집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 (☞바로가기)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 (☞바로가기)
③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上 대한민국이 간첩으로 내몬 한 여자의 '평생 자술서' (☞바로가기)
④ 삼척 고정간첩단 피해자 김순자 할머니 下 "내 아들 내 놓아라" 엄마들은 밤새 철창을 잡고 흔들어 댔다 (☞바로가기)
⑤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上 "15년 만에 알게 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 범인은 '국가'였다"(☞바로가기)
⑥'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 피해 유족 김호정 씨 下 "독재정권 시대의 인권침해" 그 한 줄로 시작된 아버지 죽음의 진실규명(☞바로가기)
⑦ 실미도사건 유족 임충빈 씨 上 1968년, 실미도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바로가기)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 ⓒ프레시안(최형락) 날짜: 2021년 10월 28일 장소: 인천 부평역 내용: 실미도 유족회 임충빈 공동대표 인터뷰

임충빈의 삶은 평범했다. 여상 졸업 후 태평양에서 8년간 근무하다 결혼하면서 사표를 냈다. 그땐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를 나가는 게 당연했다. 가정주부로 10여 년을 지내며 집안과 가정을 돌보던 중 외환위기(IMF)가 터졌다. 남편의 사업이 기울고 임충빈은 백화점에 일자리를 구했다.

임충빈은 여느 아내, 엄마로서 언제나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앞만 보며 살았다"고 했다. 정신없이 살면서도 오빠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닿을 뿐이었다.

남은 사람의 삶은 계속된다

실미도사건이 주목받으며 새로운 사실이 계속 드러났다. 매스컴은 임충빈 형제들보다 빨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임충빈이 일하는 백화점에도 종종 찾아오곤 했다. 실미도부대원의 유족이란 사실은 동료들에게 삽시간에 퍼졌다. 고객들도 종종 임충빈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임충빈에게 때때로 곤혹스럽게 다가왔다. 위로의 말과 동정의 눈빛이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때의 상처가 커 임충빈은 더 이상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엄청 흥행했고, 그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이고, 남은 가족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관심이 가겠죠. 그런데 그런 호기심 어린 눈이 저에겐 다 상처가 됐어요.

매스컴이 실미도사건을 다루는 방식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은 실미도사건을 과거에 있었던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건으로요. 남은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까지는 생각을 안 하죠.

저에겐 그냥 과거의 일, 오빠의 일이 아니에요. 아직도 너무 아픈 일이에요. 사건 기록이나 이런 걸 볼 때마다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요. 여러 번 본 건데도요."

알고 지낸 동료들, 지인들에게도 상처받긴 마찬가지였다.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뒤에서 "저 사람이 실미도사건 유족이래"라는 말도 하나하나가 다 가시로 박혔다. 그런 말들의 끝은 결국 '뭔가 꺼림칙한 집'이라는 시선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임충빈은 많은 사람과 멀어졌다.

가장 상처가 된 건 오빠가 끝끝내 범죄자이고 살인자로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뺏기고 상처와 눈물 속에서 살아온 피해자인데도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남은 사람들의 절규, "오빠는 살인자, 특수범죄자가 아니에요"

오빠의 명예회복은 점점 절실해졌다. 국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한 이유다. 당연한 요구는 시끄러운 투쟁이 됐다. 지금은 임충빈이 공동대표로 나서고 있지만 초기엔 임충빈의 두 언니가 시위를 주도했다.

그때 임충빈이 다니는 백화점은 한 달에 여섯 번 쉬었다. 다른 직원들과 쉬는 날을 바꿔가며 최대한 시위에 나갔다. 그때 각각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줬다. 가정을 잘 챙기지 못한 미안함이 남아 있다.

"저보단 언니들이 참 고생 많았죠. 일빈 언니는 돈도 엄청 썼어요. 다행히 형부들이 이해해줬어요. 시위할 때 사람들 많이 모아오고, 국방부 관계자 찾아가 항의할 때는 형부들이 앞장섰어요. 참 고마운 게 많아요.

언니들이 지금 많이 아파요. 제가 앞장서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밖에서 시위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부모님이 아프게 살았던 것처럼 지금 형제들이 아픈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아픔이 대물림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저도 환갑이 넘었어요. 제가 해결하지 못하면 자식들, 조카들이 나서야 해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선 절대 안 되고요."

"오빠가 왜 그렇게 됐는지 알려달라는 것뿐인데"

유족들은 사라진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사형집행까지의 재판기록은 물론이고 실미도부대 관련 문서, 오빠의 유언까지 관련 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해서야 받을 수 있었다.

▲임충빈 실미도유족회 공동대표가 모아놓은 자료. 국방부로부터 받은 서류와 유족들이 보낸 진정서, 탄원서 등이 있다. 임충빈 대표의 집에는 이런 파일이 수십 개가 있다. ⓒ프레시안(조성은)
▲임충빈 실미도유족회 공동대표가 모아놓은 자료. 국방부로부터 받은 서류와 유족들이 보낸 진정서, 탄원서 등이 있다. 임충빈 대표의 집에는 이런 파일이 수십 개가 있다. ⓒ프레시안(조성은)

간신히 받은 첫 자료는 많은 부분이 수정액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마저도 1급 기밀이라 줄 수 없다고 했던 것을 기밀이 해제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재판기록엔 생존 부대원들이 진술한 실미도부대의 끔찍한 실상이 담겨있었다. 오빠 임성빈이 직접 작성한 진술서 중 하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찮은 일로 정든 동료를 때려죽이게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시체를 디젤 기름에 튀겨 바다에 띄우도록 만든, 잔악한 비인간성에 몸서리쳤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판기록을 받은 날 열어보지도 못했어요. 만지지도 못했어요. 잠도 못 자고 며칠을 그러다 겨우 열어봤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몸이 막 떨렸어요.

읽는 내내 오빠가 옆에 있는 것 같았어요. 오빠가 '김일성을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고 했어요. 그게 지금 남아 있는 오빠의 마지막인 거잖아요. 그게 전부잖아요.

지금도 그거 다시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려요. 언론 인터뷰할 때도 그렇고요. 실미도사건 관련 기사를 보는 것도 힘들어요."

그러나 이러한 증언에도 실미도부대 내에서 이루어진 가혹행위와 임의처형은 철저히 은폐됐다. 8·23 사건의 경위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임충빈의 오빠 임성빈에게 적용된 혐의는 기간병 살해였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는 게 임충빈의 설명이다.

재판은 국선변호인조차 없이 완전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항소는 기각됐고 상고하지 않았다. 사형집행은 7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 구의 시신은 모두 암매장됐다.

어딨는지 모른다던 국방부, 동네 주민은 알고 있었다

국가는 죽은 부대원들의 유해가 어딨는지도 몰랐다.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제보와 증언을 토대로 찾은 가장 유력한 매장지 경기 고양시 벽제묘지였다. 무연고 사망자를 매장하는 곳이었다.

발굴은 두 차례 진행됐다. 국방부 과거사위가 처음 발굴을 시도했을 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현장을 지켜보던 유족들은 실망감에 또 눈물을 쏟았다.

▲실미도 유해 발굴현장에서. 임성빈의 사진을 들고 있는 임충빈의 언니 임일빈. ⓒ연합뉴스

"언니들은 형부들이랑 발굴현장마다 따라다녔어요. 오빠 사진들고 계속 기다렸어요. 저는 그때 못 갔는데, 그날 벽제에서도 그렇게 기다렸대요.

그런데 거기 사는 주민이 둘째 형부한테 그러더래요. 자기가 어딘지 아는데, 여기는 아니고, 저 사람들(국방부 과거사위 발굴단) 가고 나면 말해주겠다고요. 두세 삽 파면 바로 나올 거라고 했다는 거예요.

반신반의하면서도 발굴단이 다 철수하고서 그분이 알려주는 곳에 갔어요. 정말 조금 파 보니까 혁띠가 나오고 치아유골이 나오고 그런 거예요."

그러나 오빠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사형당한 네 명 모두 말이다. 암매장지가 어딘지도 찾지 못했다. 임충빈은 "죽기 전 오빠의 유해라도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가족도 모르게 사형집행…"시신 어디 묻었는지는 몰라"

2006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형집행과 암매장이 국가에 의한 불법행위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재판부터 암매장까지 관련된 이들은 모두 함구했다. 보안각서를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후에 이는 해제됐으나 증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사형집행의 책임자였던 당시 공군고등검찰부장은 2005년 진화위 1기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응하지도 않았다.

"국방부에 유해 달라고 민원도 넣고 소송도 제기했는데 자기들은 어디 있는지 모른대요. 자기들이 죽여서 묻어놓고는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요.

유해 찾아달라고 국방부에 민원을 넣으니 공군본부로 가래요. 그래서 공군본부에 진정서를 넣으니까 다시 국방부로 가라는 거예요. 나중엔 국방부에서, 자기들은 법이 없어서 뭘 못 해주니까 소송을 제기하라고 하더군요.

계속 이런 식이었어요. 모른다, 자료가 없다, 권한이 없다. 아니면 타 기관으로 가라고 책임을 회피해요. 몇 번 그러다 보면 담당자도 바뀌고 정권도 바뀌어요.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임충빈 형제들은 국방부를 상대로 유해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국방부가 유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더 기막힌 부분은 "(사망한 오빠 임성빈의) 제사주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법 때문에 못 한다"는 국가, 법대로 했으면 비극이 있었을까

임충빈은 억울하게 죽은 오빠를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었다. 유해를 찾지 못한다면 위패만이라도 모시고 싶었다. 그러나 보훈처에서는 오빠 임성빈이 살인범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빠 임성빈은 원치 않게 끌려가 지옥훈련을 견디며 임무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대로 죽기 억울해 청와대에 호소하고자 했다. 임충빈은 "오빠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됐다"며 "탈출은 정당방위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충빈은 "실미도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국가의 은폐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위가 출범하기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미도부대원들을 불법모집된 민간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게 또 문제가 됐다. 유족들은 이후 실미도사건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접수하려 했다. 이제는 민간인이라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이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훈처도 민간인은 현충원 안장 대상이 아니라며 신청도 받지 않았다.

"비밀 특수부대였어요. 분명 군인이었어요. 군복 입고 무장하고 찍은 단체 사진도 있고요. 군번도 있었어요. 부대원들 다 자기 군번을 외우고 있었고요. 군번은 군적이 있어야 나오는 거예요. 군적이 있어야 군에서 나오는 보급품을 받을 수 있고요. 근데 군적이 없다는 거예요.

민간인이면 군사재판(군법회의)도 다 무효 아니냐 했더니, '(민간인이라고 하는 건) 조사보고서에 그렇게 나와서 그런 것'이라고 회피해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다시 돌고 돌아 국방부로 갔다. 그러나 국방부는 역시나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법이 없어 못 한다'고 했다. 검찰 수사단은 소멸시효가 지나서 못 한다고 했다. 오빠가 실미도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을 때는 이미 소멸시효가 지난 상태였다. 임충빈은 "법대로 했으면 실미도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나 권익위원회의 권고는 강제력이 없어서, 인권위는 권익위에서 결론이 났으니 대상이 안 된다고 했다. 진화위 1기가 출범하자 이번엔 국방부는 유족들을 진화위로 보냈다. 과거사정리법이 있으니 해결될 것이라며.

▲벽제에서 찾은 실미도 부대원들의 유해. 임충빈의 오빠 임성빈을 비롯한 네 명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연합뉴스

진황위의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실미도부대가 특수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을 겨우 밝힐 수 있었다. 여기에 책정된 보상금은 3000만 원 남짓. 액수도 기가막혔지만 '줬으니 됐지 않느냐'는 식의 국방부의 태도는 더 기가 막혔다. 보상금이 아니라 명예회복을 하라니 이젠 "진상규명됐으니 명예회복된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아요. 다 모른다고만 하고 어쩔 수 없다고만 해요. 사과도 없고요. 뭘 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오빠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선량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왜 오빠가 그렇게 죽고 죽어서도 손가락질 받아야 하나요. 우리 가족들은 왜 그렇게 아프게 살아야 했나요."

유해도 찾지 못했다. 사건 관련자들은 여전히 베일 속에 싸여있다. 벽제에 마련된 봉안소에 부대원들의 유골함과 위패가 모셔져있다. 현충원에 모시는 건 안 된다했다. 추모공원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상규명은 더 어려워질 것이고 사건도 점차 잊힐 것이다. 명예회복이란 무엇인가. 임충빈과 국가가 서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최용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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