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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스트] '멸공'의 이름으로 짓밟은 그놈, 이름이라도 알고 죽고 싶다

원종진 기자 입력 2022. 01. 15. 14:03 수정 2022. 01. 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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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BS 탐사보도부 원종진 기자입니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평화롭게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지만 못 배웠다는 이유로, 힘 있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외면받는 사람들.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받은 '평범한 사람들의 과거사'. 지금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아이 달고 이혼당한 날 받아준 남편…어느 날 소식이 끊겼다

 
[최옥선 / 故 서창덕 씨 아내]
"서창덕 씨는요. 제가 재혼은 했지만, 참 사람이 순하고 생활력도 강했고. 아이들도 참 비록 성은 다르지만 참 잘 길렀어요. 우리 엄마한테도 잘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안 들어오는 거예요. 생전 나가서 안 들어오는 법은 없었거든요."
 
최옥선 씨의 남편 서창덕 씨는 군산의 작은 섬 개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고기잡이 배 타다 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만 했던 서창덕 씨는 14살 때부터 부모님 돌아가신 그 바다에서 배를 타기 시작합니다.

남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고깃배를 탄 창덕 씨는 요즘으로 치면 고3, 19살이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더 벌자'. 꿈 많던 소년이었던 창덕 씨는 조금이라도 일당을 더 쳐주는 조기잡이 배 승룡호를 타게 됩니다. 고향 군산 개야도 앞바다가 아닌, 저 멀리 연평도 앞바다까지 가서 조기를 잡아오는 배였습니다. 1967년, 열아홉 창덕 씨는 그렇게 그 배를 타고 나가 신나게 조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월의 밤바다는 춥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물에 걸리는 고기들이 돈다발이 걸리는 것 같아 신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땀 흘려 조기잡이를 하던 어느 날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갑자기 선단이 나타나더니, 창덕 씨가 탄 배로 접근해서 소리를 지르며 총을 들이댔습니다.
 
"잡던 거 놓고 날래 내리라!"
  

북에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지 15년…조국은 나와 가족을 버렸다


그렇게 북한으로 납치된 19살 소년 서창덕 씨는 3개월 정도 북에 억류됐다 풀려나게 됩니다. 북한 끌려가면 죽는 줄만 알았는데 다행히 무사히 풀려나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인 줄 알았던 이 일은 다행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창덕 씨는 이혼의 아픔이 있던 최옥선 씨를 만나 배 다른 자식들을 키우며 15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서 연락이 온 겁니다.
 
[최옥선 / 故 서창덕 씨 아내]
"찾아보니까 어디 동 사무실로 가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동 사무실로 가봤어요, 그래서 동 사무실 가니까 어디 뭐 반공…뭐 어디를 가라고 그래요."
 
끌려간 그곳에서 고문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서창덕 씨의 당시 진술을 담은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포승줄로 손을 묶더니 양쪽 기둥에 쇠막대기를 걸고서는 양손을 그곳에 매달아 저의 몸이 그 쇠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달아 놓고서는 수사관이 야전침대 각목으로 저를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20여 분간 가슴이고 다리고 마구 구타하여 나중에는 피를 토할 정도였습니다.'

경제 성장률이 10퍼센트에 육박하며 사회가 발전하고 신분상승 욕구가 팽창하던 그 시절, 말단 공무원들에게 간첩 검거는 신분상승의 통로였습니다. 예전 것 다 뒤져서 또 꺼내서 보고, 될 만하면 다시 보고. 결국 간첩 행위를 했다고 자백한 창덕 씨.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모든 건 달라져 있었습니다.
 
[최옥선 / 故 서창덕 씨 아내]
"얘네 아빠가 성격이 너무 달라져 있었어요. 폭력성으로 달라져 있더라고요. 살려고 노력은 했는데 너무 폭력적이라 이거는 아니구나. 못 살았죠."
 
고문실에 끌려가기 전만 해도 아빠만 보면 웃던 세 살 아들도 웃음을 잃었습니다.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동네에서는 진짜 사람 취급도 못 받았어요. 제가 나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뒤에 항상 두 명이 따라다녔어요. 학교 다닐 때도, 초등학교 다니는 데도 제 뒤에 항상 두 명이 있었어요. 저까지 관찰을 하는 거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간첩 자식이라고 때리고 애들은 빨갱이라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때리고."
 

뒤늦게 밝혀진 진실…하지만 온몸은 암세포로 뒤덮이고

창덕 씨는 그 뒤 24년을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살았다고 합니다.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정말 힘들게 사셨습니다. 진짜 저희 아버지…뭐,
배를 타다가 간첩으로 몰렸기 때문에 배는 이제 안 타셨어요. 배 타던 사람이 육지에서 먹고 살다 보니까 이제 엄청 힘든 거죠. 뭐 돈 벌이도 없고. 생활 보호 대상자로 고물 주우러 다니고."
 
그리고 지난 2008년, 법원은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서창덕 씨에게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아버지 재심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제가 철이 없었을 때라 아버지랑 아예 연락을 안 했어요. 연락을 안하고…아버지 재심 소식은 뉴스로 봤죠. 뉴스로 처음 접했고 아버지가 무죄를 받고 나서 연락이 오셨어요.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 서창덕 씨에게 남은 건 무너진 몸과 정신뿐이었습니다.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병원에서요. 아버지…그러니까 군산, 군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CT를 찍었는데 암이 많은 거예요. 온몸에. 나는 이제 못 믿겠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람들. 나를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공적으로 훈장 받고 출세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름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 하지만 서창덕 씨는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들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이들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그냥… 아버지 옆에, 병상에 누워 있으면 처음으로 아버지가 저한테 이불을 덮어 주더라고요. 아, 이불이 아니라 점퍼였어요, 아버지 점퍼. 옆에 이불이 없으니까. 자고 있는데 처음으로 잠바를 덮어주더라고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지금은.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지금 1년 좀 넘었는데… 38년 동안 제가 아버지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어요. 살면서. 그게 제일 후회가 됩니다."
 

아직 청산 안된 '평범했던 사람들'의 과거사

제가 이 보도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평범하게 살던 이 사람들을 붙잡아 가 고문했던 가해자들에 대해선 적어도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정도의 책임은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고문 가해자들은 남의 인생을 짓밟은 공로로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살아왔던 것이거든요.
민주화 운동을 했던 대학생, 지금은 정치인이 된 유명인들을 잡아 가뒀던 가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청산은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어느 날 갑자기 무너뜨린 가해자들은 아직도 역사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서창덕 씨 같은 사례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김철 / 고문 피해자]
"그 형단에 올라가서 고문받던 거, 물고문받던 거. 이런 거는 조금도 지워지질 않아요. 오히려 더 생생히 기억나요."
 
[이사영 / 고문 피해자]
"자기들이 만든 각본대로만 그걸 시인하도록 종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그때부터 고문 시작하는 거예요."
 
피해자들이 소송을 내도 고문 가해자들의 명단도 공개하지 않던 국가는 지난해 갑자기 '사과'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이 '사과'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다시금 악몽이 소환되는 고통을 겪습니다. 
[김양기 / 고문 피해자]
"나는, 지금도 군화 소리만 들으면 나는 트라우마에 빠진다. 옛날에 내가 고문을 당할 때 그 군홧발로 지하실에 내려오는 쿵쿵쿵하고 고문하려고 준비하려고 내려오는 그 군홧발 소리. 일언반구도 없다가 무죄받은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나타나서 '사과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정부에서 과거 청산을 한다며 국가 기관에게 사과를 하라고 권고를 하고, 이행률 통계를 내요. 그런데 이게 계속 이행이 저조하니까 위에서는 쪼아 댔던 것이고, 기관들에서는 마지못해 실행했던 거죠.
 
[박민중 / 인권의학연구소 팀장]
"공무원들은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예요. 할 생각도 없었고. 그냥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건데. 어떤 스텐스냐면 '아니, 하라고 해 가지고 굳이 이전에는 안 하던 걸 내가 하는데 왜 나한테 이렇게 지랄이야'. 솔직히 말하면 이런 거거든요. 안 하느니만 못한 거고. 피해자에게 또다시 2차 가해를 주고 있는 거다."
 

우리 사회가 편하게 '멸공'을 얘기하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으로 좀 써먹을 만하다 싶을 때마다 과거사 청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정치인들이 자랑하기 좋은, 남들한테 내보이기 좋은 과거사 청산도 좋지만, 정말, 지금 살아있는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과거사 청산과 화해가 무엇일까요?
 
[김양기 / 고문 피해자]
"촛불 들고 그렇게 할 때만 해도 뭔가 좀 변하겠다 하는 그런 희망, 그런 거기서 기대를 가지고 말이지 그러고 했었는데."
 
[김철 / 고문 피해자]
"그래도 내가 태어난 조국이니까. 어떻게 참…해보려고. 조국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하더라도 정치하는 사람들의 그 속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대선 국면, '멸공' 챌린지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멸공 챌린지' 논란의 양 측에 서 있는 사람들 모두 이유가 있고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정말 편하게 '멸공' 이라는 주제를 말할 수 있으려면, '멸공' 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혔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돌아봄, 또 '멸공' 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짓밟은 사람들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서진석 / 故서창덕 씨 아들]
"무조건 공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공권력을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을 만들고, 그 사람들은 훈장을 받았음에도 연금을 탔을 거 아닙니까?"
 
[이사영 / 고문 피해자]
"본인이 나한테 가해했고 잘못을 만들었으니까 본인이 와서 해야지요.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
 
[김순자/고문 피해자]
"얼굴 보고 싶어요. 나하고 정면을 보고 싶어요. 그 사람들 만나, 지금 만나면요 쳐다보고 웃고 싶어요. 어느 때는, '아, 내가 저 놈들 원수를 어떻게 갚아?' 이랬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죠."
 
(영상취재 : 양현철 / 편집 : 정용희 차희주 / 디자인 : 장지혜 최진영 / 기획·제작 : D콘텐츠기획부)

원종진 기자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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