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겨레

최고의 고고학자, 로마서 유럽 정체성 고향을 찾다

한겨레 입력 2022. 01. 15. 20:06 수정 2022. 01. 15. 20:26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한겨레S]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한겨레S]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 비온도 플라비오
로마를 복원해 삶의 모범을 찾으려 한 고대주의자
교회를 로마의 계승자로 간주..새 십자군 결성 주장도
16세기 바젤에서 출판된 비온도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뉴스레터 공짜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1460년 비온도는 수년간 저술해오던 <영광의 로마>를 드디어 마무리했다. 이런저런 저작을 통해 이미 로마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던 그에게 이후 최고의 고대학자라는 명성을 선사할 또 다른 걸작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고대 세계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르네상스 특유의 세계관이 짙게 배어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종교나 행정 그리고 관습에서 군사력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의 모든 것을 마치 백과사전을 기술하듯 하나하나 검토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만큼이나 비온도가 교황 비오 2세에게 보낸 헌정서 격의 서문이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고대 로마가 이룬 위업이 그저 한갓진 경외의 대상에 그치기보다, 현대 사회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비온도의 믿음이 여기에 완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온도가 교황청 관료로 첫발을 들여놓은 1430년대 초반의 로마는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찬란한 로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함께 교황청 서기로 일했던 선배 지식인 포조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포로 로마노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들은 그저 양 떼들이 노닐던 목초지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했고, 폐허 속에 파묻힌 크고 작은 유물들 또한 하찮은 쓰레기처럼 발부리에 채기 일쑤였다. 로마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비온도는 이런 상황을 개탄하고 로마를 고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기록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결국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형학적 연구와 휴머니스트 본연의 문헌 연구를 결합해 이른바 고고학적 역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세계를 개척했다.

인류 최고 순간 ‘로마’ 부활의 꿈

한마디로 비온도는 15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로마학자이자 호고주의자였다. 페트라르카 이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퇴락한 문화의 개혁을 위해 자신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로마를 현실에서 재건하기를 열망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비온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그에게는 로마야말로 인류 역사 최고의 순간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그것의 모든 것이 부활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다른 누구보다 강렬했다. 더욱이 이와 같은 로마의 부활이라는 비온도의 열망은 그저 사라진 옛 문명에 대한 회고적 정서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로마를 온전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물적·제도적 차원을 포함한 로마의 모든 것이 부활해야만 하고, 더 나아가 그럴 경우에만 비로소 로마의 문화가 당대의 여러 문제들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세기에 트렌토에서 출판된 저작에 나타난 비온도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코먼스

비온도의 호고주의적 로마에 대한 애정에서 옛 세계에 대한 향수 어린 동경만큼이나, ‘희망’이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정서 또한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비오 2세에게 이야기했듯이, 그는 자신이 발굴하고 재현한 로마의 모든 것이 로마인들이 구가했던 덕성 있고 선한 삶의 “거울이자 예시, 그리고 이미지이자 원리”로 동시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물론 이 점에서 그를 역사를 생의 교사로 생각했던 키케로의 후계자로 평가해도 무리는 없다. 하지만 비온도에게서 15세기 중엽의 이탈리아를 휘감던 남다른 위기의식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의 호고주의가 지니는 진면목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 <영광의 로마>가 1459년 비오 2세가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간 만토바 공의회의 염원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는 점이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튀르크의 위협은 유럽 세계 곳곳에 세기말적 분위기를 드리웠고, 그 위기감이 가장 강하게 감지된 곳이 바로 교회였다. 이에 교황 비오 2세는 새로운 십자군 제창을 부르짖었고 그것을 위해 소집된 것이 만토바 공의회였다. 교황청의 핵심 인사로 공의회에 참석했던 비온도 역시 교황의 십자군 대의에 공감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즈음 그가 네편의 논고를 작성해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도록 여러 유럽인들에게 호소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였다. 아무튼 <영광의 로마>에서 비온도는 자신의 작품이 튀르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로마인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주저하던 당대의 유럽인들 또한 옛 로마인들의 삶을 좇아 기꺼이 성전의 길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기독교공화국이라는 이상 혹은 염원

물론 그것은 비온도의 염원이자 바람에 지나지 않았고,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교황에게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기 특유의 수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런 생각 속에, 유럽을 기독교 공화국(Respublica Christiana)으로 갈음하고 그것의 뿌리를 고대 로마 세계에서 찾으려던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역사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에게 고대 로마는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지내면서 로마의 관습과 생활 방식을 공유한 “문명화”된 통합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온도가 이제 교황청 중심의 기독교 공화국이 로마의 후손으로서 유럽을 통합해야 한다는 염원을 표출했던 것은 아닐까. 유물과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로마 세계를 복원하려던 비온도의 호고적·고전적 관심이,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유럽인들의 배타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수렴되는 흥미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비온도의 저작. 위키미디어

아무튼 그래서일 테다. 비온도에게서 우리는 오늘날의 역사가나 고고학자와는 다른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물론 브루니와 라틴어의 변천에 관해 논쟁하던 젊은 시절의 그에게서, 그리고 로마 멸망 이후의 이탈리아 역사를 검토한 그의 또 다른 저작에서 시간의 변화에 주목하는 조숙한 역사가의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온도에게 영적 고향 로마는 언제나 ‘단일하고 균질한 세계’였고,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이 꿈꾼 기독교 공화국이라는 이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온도가 복원하려고 열망했던 로마라는 세계는 결코 특정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로마도, 그리고 시간의 변화 속에서 형성된 인간 사회도 아니었다. 고대에 대한 숭모와 기독교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가로놓인 모순의 결과였다. 르네상스인 비온도에게 로마는 그렇게 유럽 문명이라는 자기-정체성을 벼리는 준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