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5] 세상을 놓고 영웅들의 승부가 시작됐다

장일현 기자 입력 2022. 1. 18. 00:00 수정 2022. 1. 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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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 전투를 치른 어느 날 저녁 문득 나는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위대한 일을 수행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 기슭에서 1900km 떨어진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 워털루 전투(1815)에서 패해 이곳에 유배를 당한 나폴레옹은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로디 전투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나폴레옹이 1796년 5월 10일 밀라노 남동쪽 31km 지점에 있는 아다 강의 로디 다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킨 전투입니다.

조제핀과 결혼한 지 이틀만에 원정에 오른 27세의 사령관 나폴레옹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휩쓸었습니다. 출정 당시 프랑스군은 3만8000명, 오스트리아-사르데냐군은 4만7000명으로 숫적 열세였지만 나폴레옹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르데냐를 한 달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습니다. 이듬해 2월 만토바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2개월 동안 열두번이나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두 손 들고 휴전을 제의하게 됩니다. 이로써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3년에 결성된 제1차 대불동맹은 붕괴됐습니다.

베로나 인근 아르콜에서 벌어진 나폴레옹의 승전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아르콜 다리 너머로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부분). /위키피디아

로디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 때 치른 3번째 전투였습니다. 전투 초반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리를 건너 돌격하다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400여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이 때 나폴레옹이 직접 깃발을 들고 선두로 치고 나갔고, 이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했습니다. 동시에 강 상류와 수심이 낮은 곳으로 강을 건넌 프랑스 병사들이 협공에 나서자 오스트리아군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대포 12문, 박격포 2문을 잃었습니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5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대담하고 용기있는 행동에 감명받은 병사들은 그를 ‘꼬마 하사관’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등장

1769년 지중해 북부 프랑스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178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포병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장 자크 루소의 책을 탐독했고, 급진적인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그가 처음 이름을 알린 건 1793년 프랑스 프랑스 남부 툴롱 전투였습니다.

1789년 7월 14일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주변국들에겐 큰 위협이 됐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792년 초 동맹을 체결했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을 결정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그해 4월 오스트리아에, 7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1793년 초 프랑스 혁명 정부가 루이 16세의 사형을 집행하고,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네덜란드 등이 제1차 대불동맹을 결성했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극좌파인 자코뱅파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리옹과 마르세유 등에서 반발이 터져나왔습니다. 혼란을 틈타 남부 항구도시 툴롱에서도 왕당파가 혁명세력을 쫓아내고 영국군 등 외세를 불러들였습니다. 이 때 왕당파를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는 포병 병과 출신 답게 포병을 적극 활용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9월 대위 계급으로 전투에 참가한 나폴레옹은 고속 승진을 거듭해 12월에는 준장이 됐습니다. 그의 나이 만 24세였습니다.

나폴레옹이 군과 정계에서 주요 인물로 크게 부상한 건 2년 후인 1795년 왕당파의 파리 반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역사에서는 10월 5일 일어난 이 사건을 ‘방데미에르 13일의 반란’ ‘포도달 13일의 폭동’ 등으로 부릅니다. 극도의 공포정치를 펼치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1년여 만에 자코뱅파가 몰락한 이후, 프랑스에선 새로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는데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선거제도가 바뀐 것을 알게 된 왕당파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시위대는 크게 불어났습니다. 혁명 정부가 전복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나폴레옹이 사태를 평정했습니다. 그는 대포 40문을 파리 시내에 배치하고 시위대를 향해 ‘포도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시위대는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중장으로 진급을 했고, 이듬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도중이던 1799년 조국이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고 자신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자 급거 귀국,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세 명의 통령이 국정을 공동 운영하는 형식이었지만 나폴레옹이 임기 10년의 제1 통령에 올라 실권자가 됐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802년 종신 통령 자리에 오르더니 1804년 황제가 됐습니다. 툴롱 전투에 참가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지 11년, 이탈리아 로디 전투 때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야심을 갖게 된 지 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35세였습니다.

스스로 왕관을 집어들어 교황보다 황제가 우위에 있음을 천명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모습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 1세 황제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부분). 루브르 박물관 소장. 관을 들고 선 나폴레옹 뒤편(그림에서 오른쪽)의 교황 등 참석자들의 초상도 명확히 그려졌다. /위키피디아

당시 그가 황제가 되어도 좋은지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찬성률이 99.9%였다고 합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것과 달리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잇는 군주가 아니라 위대한 샤를마뉴 대왕의 후계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황제관도 직접 썼다고 합니다.

전투에 관한 한 나폴레옹은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누가 뭐라든 그와 비견될 사람은 없으며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략의 달인이었고, 전투 현장에선 항상 공격적이었습니다. 유리한 때와 장소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천재적 안목과 역량을 가졌습니다. 적은 상상도 못할 부대 이동과 작전을 구사하곤 했습니다. 그는 “전투의 승패는 단 한 수에 달려있다.” “교전시 아주 작은 작전 행동이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 주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릇의 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한 방울의 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분이 아니라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자신이 최고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재능있는 사람에게 길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등용한 원수 26명 가운데 귀족 출신은 단 2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부하 장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리더십은 어딜 가든 부하들의 자발적 존경과 충성을 이끌어냈습니다. 장병들은 기꺼이 그와 함께 전장에 뛰어들었고, 영웅심에 불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한 프랑스 병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여러가지 고통을 웃어넘겼다. 우리의 장교들은 등에 잔뜩 짐을 짊어졌으며, 우리와 함께 변변찮은 급식을 나누어 먹었다.”

◇바다에 막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海戰) 중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1805)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전쟁 영웅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이 해전은 사실 한 차례의 결정적 대승이나 넬슨 제독의 개인 영웅담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즉, 그때까지 영국 해군이 일궈온 수 많은 노력과 성취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총체적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선 해전의 전개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1805년 10월 21일 전열함 27척으로 구성된 넬슨의 함대가 트라팔가르곶 앞바다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의 전열함 33척과 마주쳤습니다.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오면 바로 나타나는 해역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해 프랑스 북서안 불로뉴항에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켰지만 강력한 영국 해상 봉쇄에 막혀 꼼짝도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카디스 항에 있던 연합함대에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원정군을 영국에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은 “6시간 정도만 영국해협을 장악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최소한 6일 정도는 필요했을 것이라고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후 상황이 바뀌어 나폴레옹은 대륙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등과 격전을 치르기 위해 불로뉴에 있던 원정군을 라인 강 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연합함대에겐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디스 항을 떠난 연합함대는 지중해쪽으로 가다 넬슨 함대를 만났습니다. 넬슨은 함대 군함들에게 깃발 신호로 “영국은 제군들이 각자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포츠머스 왕립 해군 박물관에 전시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호의 당당한 위용. 운명의 날이었던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넬슨 제독은 이 배 위에서 나폴레옹의 야망을 침몰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당시 해상 전투는 양쪽 군함들이 11자형으로 평행하게 항행하면서 상대 함정을 향해 일제히 함포를 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함대는 완전히 다른 전술을 들고 나왔습니다. 앞뒤로 줄지어 항행하는 연합함대의 옆구리를 향해 2개조로 나뉜 영국 함대가 직각으로 치고 들어갔습니다. 한마디로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 작전입니다.

사실 이 전술은 아주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열함은 2~4단 갑판을 만들고 옆구리쪽에 대포를 수십문 설치해 놓은 함정입니다. 앞이나 뒤에는 대포가 없기 때문에 영국 함정은 상대방 함대 중간에 끼어들 때까지는 함포를 쏠 수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상대방 대열에 들어가면 상황은 역전됩니다. 영국 함정이 좌우로 적선을 향해 함포를 쏘게 되고, 상대방은 영국 함정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는 1척이 침몰하고 21척이 나포당하는 괴멸적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로 영국은 완벽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됐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19세기 내내 말이죠. 나폴레옹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륙 점령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을 고립시키겠다며 대륙봉쇄(베를린 칙령, 1806년 10월)를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결국 그의 자충수가 되고 말지요. 이처럼 트라팔가르 해전은 나폴레옹 전쟁의 물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국 함대는 어떻게 이런 과감한 작전 수행과 대승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제 11년 전으로 돌아가 볼 시간입니다.

◇넬슨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이후, 최초의 해전은 1794년 6월 1일 벌어진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입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브레스트 함대에게 미국에서 오는 대규모 곡물 수송선단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대서양으로 나간 프랑스 함대는 하우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프랑스 함대는 전열함 26척, 영국 함대는 25척이었습니다.

이때 하우 제독이 구사한 전술이 바로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였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11년 앞서 이미 영국 함대는 이 전술을 실전에서 구사했던 것입니다.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에서 영국은 프랑스 전열함 1척을 침몰시키고, 6척을 나포했습니다. 반면, 영국이 잃은 배는 한 척에 불과했습니다. 영국은 이 해전 승리로 바다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프랑스와 동맹군 함대는 항구에 정박해 방어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는 영국 함대의 핵심 전투 전술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 중요한 해전에서 영국에게 승리를 안겨주게 됩니다.

전술과 함대 기동 못지 않게 주목을 해야 할 점은 장병들의 전투력이었습니다. 여러 전쟁 관련 서적을 보면, 당시 영국 해군은 어느 나라 해군보다 압도적인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능력있는 장교와 수병들이 탄 영국 함정은 상대보다 빠르고 공격력도 우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함포는 1분에 1발을 쐈지만, 프랑스 함정은 2분에 1발 정도를 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해군은 3~4분에 1발을 쏘는 정도 였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 동안 영국은 상대방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3~4배 많은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여러 해전의 승리로 영국 함대가 바다에서 더 오래 많이 활동했고, 반대로 상대방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렇게 양쪽 실력 차이는 갈수록 벌어졌습니다. 영국 수병들이 해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선박 조종술과 포술은 더욱 향상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영국 함대는 함정간 신호 체계에서도 앞서 나갔습니다. 바다에서 아군 함정들이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면 승리 가능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당시 함정간 신호 체계를 완전히 바꾸고 개선한 사람이 ‘6월의 영광스런 첫날’ 해전을 승리로 이끈 하우 제독이었습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의 사기와 전투력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혁명 발생 이후, 대규모 숙청으로 유능한 지휘관들이 대거 제거됐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월급이 지급되지 않아 많은 수병들이 군을 떠나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제대로 된 훈련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프랑스 해군은 배를 제대로 다룰 능력도 포를 빠르고 정확히 쏠 실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함대에는 새로 모집한 신병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실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는 걸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 또 한 명의 영웅,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넬슨입니다. 그는 첫 전투인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1797)’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 이어 ‘나일강 아부키르만 해전(1798)’ ‘코펜하겐 해전(1801)’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탁월한 공적을 상징하는 훈장으로 가득한 넬슨 제독의 초상화.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은 12세 때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해군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상하를 막론하고 주변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능력면에서 독보적이었다고 합니다. 해군 지휘관이 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전투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뛰어난 상황 판단, 과감한 작전, 솔선수범하는 지휘력 등입니다.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797년 초 에스파냐 제독 돈 호세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전열함 27척이 프랑스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카디스 항을 출항했습니다. 존 저비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전열함이 15척에 불과했지만, 포르투갈 남서쪽 끝단 세인트 빈센트 곶 앞바다에서 에스파냐 함대와 정면으로 맞붙었습니다.

여기서도 영국 함대는 ‘옆구리에서 대열 깨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단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영국 함대는 에스파냐 함대의 측면을 뚫고 들어가 상대방 진영을 둘로 분리시킨 뒤, 다시 돌아와 막강 함포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에스파냐 함대를 뚫는데는 성공했는데, 길게 늘어선 영국 함대가 방향을 틀어 다시 돌아오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에스파냐의 일부 함정이 현장을 벗어나 도망가려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넬슨이 탄 캡틴호는 영국 함대 대열에서 이탈, 에스파냐 함정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넬슨의 행동은 심각한 규율 위반이 될 수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한발 빠른 대응으로 영국 함대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 함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고, 전열함 4척을 영국에 빼앗겼습니다.

코펜하겐 전투도 넬슨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얘깃거리입니다. 1801년 4월 영국 해군의 하이드 파커 제독과 넬슨 부사령관은 코펜하겐 부두에 있는 덴마크 함대를 공격했습니다. 양쪽 함대간 치열한 함포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상대방이 예상보다 강력하게 저항하고, 아군 피해가 늘자 파커 제독은 넬슨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넬슨은 이를 무시하고 전투를 계속했고, 영국 함대는 3시간 정도의 포격전 끝에 덴마크 함정 17척을 나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넬슨은 자신의 기선을 지휘하는 토머스 폴리 함장에게 “나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 난 정말이지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했는데, 이 말을 하면서 망원경을 오른쪽 눈에 갖다 댔다고 합니다. 전투 현장에서 그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상관의 말도 무시해 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 전쟁 시기 해전(海戰)을 좌지우지했던 영국 해군 승리의 상징이자 영웅이었던 넬슨 제독은 지금도 영국인들에게는 자랑인 것 같습니다. 지난 2005년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BBC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사를 통틀어 영국을 빛낸 위인 100인 중 10위 안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평가에는 그가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장렬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전 편지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적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요. 총알이 폐를 관통해 척추 깊숙이 박힌 이후에도 4시간 동안이나 전투를 지휘했고, 승리를 확인한 뒤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편, 넬슨 제독에 의해 영국 정복과 바다 진출이 막힌 나폴레옹은 어떻게 됐을까요. 비록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대륙에서는 연전연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성기는 이제 막이 올랐다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명장 웰링턴과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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