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같은 형, 내가 살려내고 내 손으로 끝낼겨".. 충청도 '햄릿' 外傳

박돈규 기자 2022. 1.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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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조치원­ - 새가 이르는 곳
배우 출신 이철희가 쓰고 연출.. 충청도 사투리, 앙상블 돋보여
연극 ‘조치원‘에서 만국(이대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등장한 ‘형’이라는 아버지와 싸운다. /사진작가 김솔

조명 들어오면 무궁화호 야간열차. 승객 대부분은 눈을 감은 채 객차와 함께 조금씩 흔들린다. “필요한 거, 필요한 거~” 하면서 카트가 지나가자 만국(이대연)이 맥주를 한 캔 산다. 조치원까지 가는 만국은 시를 쓴다는 남자에게 “남인수 노래처럼 써봐요, 피를 짜내듯이” 하더니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조치원-새가 이르는 곳’(연출 이철희)은 이렇게 출발하는 연극이다. 무대는 기차처럼 길쭉하다. 관객은 어디에 앉든 무대 건너편 관객이 시야에 들어온다.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하면서 생략과 비약의 속도감을 높이는 구조다. 만국이 들려주는 과거는 40년 전 아버지의 장례로 열린다. 두 아들 성국(김문식)·만국이 통곡하는데 송장에서 복수(腹水)가 터져 바닥이 축축해진다. “양수부터 복수까지, 오실 때나 가실 때나 똑같네”라고 누가 중얼거린다.

다시 현실. 사실 만국은 형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조치원행 밤기차를 탔다. “성, 시방 나 내려가네. 행여 나헌티 사과 같은 거는 허지 마. 니가 내 가슴에다 꽂은 이 송곳, 용서 안 할 거니께”라는 그의 독백처럼 이 형제는 원수지간이다. 아버지가 죽고 만국이 입대한 사이에 형 성국이 만국의 여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했고, 제대한 다음엔 복숭아밭 한 평 안 떼어주고 빈털터리로 내쫓았다. 성국은 “썩은 복숭아는 골라내야 해. 안 그럼 성한 것까정 썩어. 넌 그 부아를 도려내야 해”라고 빈정거린다.

연극 '조치원'은 무대가 이렇게 객석을 가로지르는 독특한 구조다. /사진작가 김솔

이 연극은 제4회 벽산희곡상을 받은 한국판 햄릿 ‘조치원 해문이’의 프리퀄이다. 극작가 이철희는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는 왜 햄릿의 아버지를 살해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셰익스피어도 알려주지 않는 비극의 이면을 파고들어간 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중장기 창작지원사업 선정작으로, 지난해 초연에 이어 배우 이대연이 주인공 만국을 맡아 형을 죽일 수밖에 없는 동생을 처연하게 그려냈다. 충청도 사투리와 위트, 빠른 장면전환, 연기 앙상블도 돋보였다.

기차가 조치원에 다가갈수록 고민은 깊어진다. 죽어가는 형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간 한쪽을 떼어주고 살릴 것인가. 만국은 “가서 내 간 떼어주고 성 살릴라네. 그런 다음에 내 손으로 끝낼 거여”라고 말한다. 손에는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가 있다. “우리 열차 곧 조치원, 조치원에 도착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차창 밖에는 어둠 속에 생선가시처럼 겨울나무들이 새하얗게 서 있다.

이철희의 ‘조치원’(23일까지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 말고도 2월 18~27일 나란히 공연될 신안진의 ‘낮은 칼바람’, 최원석의 ‘화로’ 등 배우가 직접 희곡을 써 무대에 올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공연계 관계자는 “40대부터 배우들은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드는데 이철희·신안진·최원석은 극작가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 배우들”이며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캐릭터 묘사와 차진 대사가 강점”이라고 했다.

연극 '조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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