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HDC현산, '위기관리체계의 위기'

유병훈 기자 2022. 1. 1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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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의 신축 아파트(화정 아이파크) 건설 현장에서 붕괴 사고가 발생한 지 7일이 지났는데도 사태 해결에 별다른 진전이 없자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의 위기관리 방식에 대한 비판이 끊아질 않고 있다. 정몽규 회장이 지난 17일 책임을 지겠다며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불신은 가라앉지 않은 모양새다. 사고로 인한 추가 건축비용은 물론 배상·보상금 등 직접적인 재무적 손실이 불가피하고,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 가치 하락 우려까지 커진 상황에서 뚜렷한 대책 없이 책임자가 옷을 벗는 모양새만 연출했기 때문이다.

광주 서구 신축아파트 붕괴사고 현장 /연합뉴스

18일 HDC현산에 따르면 사고 당일인 지난 11일 유병규·하원기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들과 구조 안전 전문가 등 50여명이 사고 현장에 급파됐다. 정몽규 회장도 광주에서 현장 수습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튿날인 지난 12일에는 정몽규 회장 대신 유병규 대표가 사과문을 발표했다. 유 대표는 “HDC현대산업개발의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로 인하여 피해를 보신 실종자분들과 가족분들, 광주 시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린다”며 “있을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저희 HDC현대산업개발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재 유관기관의 협의하에 실종자 수색·구조와 추가 피해 방지를 위한 안전 확보 대책을 수립하고,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확보했다. 앞으로도 추가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면서 “수사기관의 조사와 국토교통부 등의 사고원인 규명에도 성실히 임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움직임에도 HDC현산을 바라보는 눈길은 싸늘했다. 사고의 규모와 의미를 고려할 때 최소한의 모양새만 갖추려 했을 뿐 본질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읽기 힘들다는 것이다. 위기 커뮤니케이션·위기 관리를 전공한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사회와 기업의 위기 상황에서 HDC현산의 태도는 0점짜리 자세”라고 말했다.

김영욱 교수는 “메시지 측면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잘못을 했고 ▲어떤 형태의 책임을 지겠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개선하겠다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면서 “포맷(형식) 면에서도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책임을 수용하고 위로·공감하겠다’는 태도보다는 1장짜리 발표문을 읽고 질문도 받지 않고 가버리는 모양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태도와 메시지는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면피용 사과’로 보이기 쉽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또 “메신저와 관련해서도 유병규 대표보다는 정몽규 회장이 직접 나섰어야 했다”고도 했다.

HDC현산은 또 지난 13~14일 이틀간 전국 65개 모든 현장의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특별 안전점검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HDC현산은 “전 현장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한 긴급 조치”라며 “이번 안전 점검을 통해 만에 하나 있을 위험요인을 제거해 안전성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경영진이 전국 현장의 안전 점검과 고위험 작업관리 현황을 파악하고, 특히 위험성 상위 등급 작업 현장의 경우 직접 방문해 작업계획·방법, 안전관리체계 등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 이틀 동안 전국 65개 사업장의 위험 요인을 진단하는 것이 과연 실효성 있는 것이냐는 물음표가 바로 따라붙었다. 한 대형 건설사의 건설 현장 안전 관리자는 “HDC현산은 소위 ‘1군 업체’라 1만평(3만3000㎡) 이상의 대형 사업장이 많은데, 이런 곳은 걸어서 둘러보기만 해도 반나절은 걸린다. 아파트 등 고층 건물도 공사 단계, 환경 등에 따라 층마다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틀 동안 이 모든 변수를 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정도로 꼼꼼히 확인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전국 현장의 공사를 한동안 멈추는 것은 비용이 상당히 드는 일이겠지만, 국민의 불안이 커진 상황이라면 투자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던 것 같다”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더 과감히 투자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엿새 만에 나타난 정몽규 회장은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직을 사퇴하겠다며 “안전을 우선해 외부 전문가와 당국과 상의하고 수분양자에 대한 계약해지는 물론 아파트 철거와 재시공 방안까지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또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모든 건축물의 안전보증 기한을 기존 10년에서 30년으로 대폭 강화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HDC그룹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형식적인 사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데다, 철거와 재시공 등도 안전진단 결과를 보고 진행하겠다는 것이어서 분양을 받은 사람들의 불만은 잦아들지 않은 모양새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퇴라는 게 일견 책임을 지는 모양새로 보이지만, 결국 지주회사의 회장으로서 HDC현산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 유지할 수 있고 추후라도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면서 “또 보증기간을 30년으로 늘린다는 것 역시 그리 혁신적인 재발 방지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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